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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로는 어떻게 서울의 중심이 됐나

서울시 '세종로이야기' 발간

현재의 세종로 일대가 조선시대 경복궁에서 숭례문까지 이어지는 도시의 중심지로 형성된 과정과 일제 시대에 어떻게 왜곡, 훼손됐는지 등을 다룬 단행본이 나왔다. 서울시는 11일 "도심 광장 조성사업을 추진하면서 세종로에 대해 새롭게 알게된 역사적 사실을 시민들에게 알리기 위해 `세종로 이야기'라는 책자로 발간했다"고밝혔다. 이 책에 따르면 세종로는 조선시대 한성(漢城)의 `육조 거리', `해태 앞', `비각 앞' , `황토마루' 등으로 통했고, 일제 때는 `광화문통'으로 불리다 광복 후인 1946년 10월부터 세종대왕의 묘호(廟號)를 딴 `세종로'로 불리기 시작했다. 당시 한성의 구조를 보면 정도전의 `백악주산설(白岳主山說)'에 따라 백두산과지리산의 지세가 모인 북한산과 관악산을 연결하는 축선을 도읍지의 상징축으로 정해 이 축선 위에 도성의 정문인 숭례문과 정궁인 경복궁을 지었다. 그러나 풍수지리에 능통했던 무학대사가 관악산이 불길 모양의 `불의 산(火山)'이어서 관악산과 북한산을 축으로 하면 도시가 화(禍)를 당하게 된다고 주장했다. 이에 따라 관악산의 화기(火氣)를 막기 위해 경복궁의 주작대로(광화문∼숭례문)는 광화문 앞길 130m 구간만 직선이고, 그 다음부터 종로 입구까지는 도로의 중심이 동쪽으로 최대 39m 가량 휘어진 구조로 조성됐다. 또 경복궁 정문인 광화문 앞에 불을 먹고 산다는 상상 속의 동물인 해태상 두개를 세우고, 숭례문 밖에 남지(南池)라는 연못을 파는 등 도심 곳곳에 관악산의 불길을 막는 구도를 만들었다. 그후 국권을 강탈한 일제는 1923년 해태상을 철거해 총독부 박물관으로 옮겼고,일제가 조선에서 만든 첫 담배의 이름도 `해태'로 지었다. 일제는 1916년 경복궁 안에 조선의 상징축선에서 동쪽으로 5.6° 틀어진 위치에`日'자 모양의 총독부 청사를 짓고, 1920년에는 남산 아래 일본 조상신을 모시는 신전 조선신궁을, 1925년에는 덕수궁 앞에 `本'자 모양의 경성부 청사를 지어 `일본의축'을 형성한다. 일제는 또 세종로의 폭 53m 중 경복궁을 바라보고 동쪽 끝에서 34m 지점에 은행나무를 심어 도로의 중심이 조선총독부의 정문의 중심과 일치하게 만들었다. 수령이 수백년인 은행나무로 일제의 축을 만든 것은 한반도를 영원히 지배하려는 의도를 나타낸 것이라고 책은 설명하고 있다. 이 책에는 그밖에도 광복 이후 광화문이 복원되고 충무공의 동상이 세워지는 등 세종로 일대의 복원과 확장, 발전 과정에 대한 설명도 담고 있다. 시 관계자는 "세종로는 조선시대 이후 서울의 대표적인 중심가였다"며 "이 책을통해 세종로에 얽힌 역사적 사실들이 시민들에게 바르게 알려져 그 역사성과 상징성을 되찾게 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서울=연합뉴스) 김정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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