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회장만 있고 '시스템' 은 없었다<br>삼성과 빅딜협상자 전권없어 진땀<br>임원 직언땐 "하라는대로…" 호통<br>황제적 리더십이 조직에는 毒으로
| 국가원수 친구들 많았지만…
김우중 회장은 많은 국가 원수들을 '친구'로 두었다. 이슬람 카리모프 우즈베키스탄 대통령도 그중 하나였다. '정경유착의 세계화' 라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분명 세계경영을 효과적으로 실현할 수 있게한 원군이었다. 과유불급이라고 했던가. 사업성 없는 무차별적 서방 진군이 남긴 것은 '모래성 제국' 이었다. /서울경제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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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개 숙인 전문경영인
대우의 전문경영인들은 세계경영의 꿈을 키우며 김우중 회장을 받들었다. 김태구 전 대우자동차 사장은 그 중심에 서 있었다. 위기의 순간, '황제 김우중'은 그들의 진언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서울경제DB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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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秘錄, 김우중신화의 몰락] 절대 권력의 최후
金회장만 있고 '시스템' 은 없었다
김영기 기자 young@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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秘錄, 김우중신화의 몰락 [전체보기]
ㆍ삼성과 빅딜협상자 전권없어 진땀
ㆍ임원 직언땐 "하라는대로…" 호통
ㆍ황제적 리더십이 조직에는 毒으로
ㆍ화려한 '세계경영' 에도 독단 여전
ㆍ金회장이 서방 진출 결정하면
ㆍ사업성 없어도 계열사 들러리 참여
1999년 1월31일 오후 구미공단 대운동장. 1만5,000여명에 달하는 대규모 군중이 모였다. 97년 대통령 선거 이후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운집한 것은 처음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머리에 빨간 띠를 둘렀고, 요란한 구호를 담은 플래카드도 넘실댔다. 대우전자와 LG반도체의 근로자들이었다. 집회를 주관한 측은 한나라당. ‘부당 빅딜 규탄 대회’라는 이름으로 장외 투쟁에 나선 것이다. 1년여전 김대중(DJ) 대통령에게 석패한 이회창 총재와 박근혜 부총재까지 나서 빅딜을 중단하라고 목청을 높였다.
같은 날 밤 9시 청와대 서별관 경제수석실. 일요일 늦은 시간인데도 불이 환하게 켜 있었다. 형광등 불빛사이로 이학수 삼성, 김태구 대우 구조조정본부장의 얼굴이 넌지시 비쳤다. 강봉균 수석의 목소리 데시벨이 전례 없이 올라갔다. 불과 일주일 전 DJ는 이건희 삼성 회장과 김우중 대우 회장을 불러 자동차 빅딜을 빨리 마무리하라고 재촉한 터. 방안에서는 이따금 고함소리도 흘러 나왔다.
국가원수 친구들 많았지만…
김우중 회장은 많은 국가 원수들을 '친구'로 두었다. 이슬람 카리모프 우즈베키스탄 대통령도 그중 하나였다. '정경유착의 세계화' 라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분명 세계경영을 효과적으로 실현할 수 있게한 원군이었다. 과유불급이라고 했던가. 사업성 없는 무차별적 서방 진군이 남긴 것은 '모래성 제국' 이었다. /서울경제DB
고개 숙인 전문경영인
대우의 전문경영인들은 세계경영의 꿈을 키우며 김우중 회장을 받들었다. 김태구 전 대우자동차 사장은 그 중심에 서 있었다. 위기의 순간, '황제 김우중'은 그들의 진언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서울경제DB
강 수석 앞에는 A4 크기의 종이 한 장이 놓여 있었다. ‘삼성차 선인수 후정산을 위한 기본 합의문’. 이 본부장은 지체 없이 서명하고 9시 뉴스가 끝날 즈음 자리를 떠났다.
김 본부장만이 남았다. 강 수석과 김 사장은 수정작업을 되풀이하며 합의문을 만들어 나갔다. 문서가 거의 마무리된 자정 무렵. 김 본부장에게 긴급 메시지가 전달됐다. 김 회장의 전화가 왔으니 받아보라는 내용이었다. 돌아온 김 본부장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합의문에)서명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장난 하는 거요. 갑자기 이유가 뭐요.”
“…”
승강이는 한시간 가까이 이어졌다. 김 본부장의 얼굴에 진땀이 흘렀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윗분’의 뜻을 어기고 서명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협상의 ‘전권’을 가진 자(삼성)와 그렇지 못한 자(대우)의 차이였다.
“당장 사인을 하든지, 아니면 사인할 수 있는 다른 사람을 데려오든지, 이도 저도 못하겠다면 이 방을 나가시오.”
강 수석은 불같이 화를 냈다. 어찌 보면 ‘김우중 아닌 다른 사람’과 협상을 하려 했던 것 자체가 무의미한 일이었다.
한 걸음도 나가지 못하는 빅딜, 환부는 더욱 곪아갔다. 국내에서 돈을 빌려 해외 빚을 갚고, 은행에서 빌려 2금융권 빚을 상환하는, 전형적인 ‘돌려 막기’가 거듭됐다. 형틀이 만들어지고 있었는데도 , 대우 그룹 경영진 어느 누구도 김 회장에게 제대로 된 진언을 하지 못했다. 아니 말을 해도 들으려 하지 않았다는 게 보다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이 즈음 김 회장의 청각 능력에도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절대적인 카리스마. 초인적인 부지런함과 탁월한 정치적 감각으로 신화를 만들어냈던 그의 황제적 리더십은 정작 그룹은 물론 그 자신의 운명까지 좌우할 수 있는 결정적인 순간을 맞아 이렇게 독(毒)으로 작용했다. 빅딜 협상에 참여했던 삼성 임원의 회고.
“모든 걸 김 회장에게 의존하려 했어요. 김태구 본부장이 가진 재량권은 전혀 없었어요. 하루 종일 협상을 해도 결론 나는 건 하나도 없고….”
전직 대우 맨들은 ‘인간 김우중’의 경영 수완에 예외 없이 경외감을 표시했고, 신화가 몰락한 지금도 변함이 없다. 하지만 ‘시스템 대우’에 이야기가 옮겨가면 고개를 떨군다. 그룹 전체의 자금사정을 꿰뚫고 있는 사람은 김 회장湛潔駭? 전문 경영인들 조차 그 앞에서 고개를 들지 못했다.
김 회장 못지않은 신화적 존재로 알려진 전주범 전 대우전자 사장. 46세 때인 98년 대우전자 상무에서 세 계단이나 뛰어 오르며 사장으로 발탁된 인물이다. 그는 취임 즉시 해외 사업장에 “본사 지원을 기대하지 말고 스스로 일어서라”며 독려하고 나섰다. 결과는 1년 만에 14개 사업장 모두 흑자. 하지만 그 조차도 김 회장에게는 맞서지 못했다.
98년12월. 대우전자와 삼성차의 빅딜이 발표되는 순간, 그는 사내에 메일을 띄웠다.
“분노를 느낀다. 우리끼리 뭉쳐 독립법인을 추구할 수도 있다.”
황제에 대한 반발. 저항은 용납되지 않았다. 전 사장은 결국 취임 1년을 채우지 못하고 쫓겨났다. 대우라는 조직의 체질이 워낙 허약하다 보니, 총수의 경영 독단을 견제할 장치도 없었다. 경기고 출신의 J사장은 대우가 패착에 이르게 된 원인 가운데 하나를 학맥에서 꼽았다.
“김 회장 밑은 경기고 후배들로 가득했어요. 김 회장이 한번 결정하면 반대 의견을 개진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어요.”
그랬다. 김 회장이 대우실업을 세운 것은 31세 때인 67년 3월. 김 회장은 경기고 2년 후배인 윤영석 전 대우중공업 회장(현 두산중공업 부회장) 등을 영입하면서 타이프라이터를 제외한 나머지 전원을 경기고 출신으로 채웠다. 대우가 몰락할 즈음에는 임원 10명 가운데 9명이 경기고ㆍ서울대(KS) 출신이었다. 경기고 규율부장을 지낸 김 회장에 대항할 수 있는 경영진은 없었다.
‘똑똑한’ 김 회장은 실무에도 탁월한 능력을 지녔다. 창업세대 가운데 김 회장만큼 실무 경험을 갖고 있는 사람도 없었다. 때문일까. 김 회장은 오너임에도, 재계에서 늘 아웃사이더였다. DJ의 후광(?) 덕택으로 98년2월 최종현 회장으로부터 전경련 회장직을 물려 받을 때까지만 해도 그는 오너들의 친목 모임에서 ‘초대 받지 않은 손님’이었다. 그는 회장단 회의에는 어울리지 않게 실무적인 아이디어를 불쑥 꺼내곤 했다. 총수들과 궁합이 맞을 리 없었다.
절대적인 힘에 길들여진 조직 문화. 대우구조조정추진협의회 의장을 맡았던 오호근 전 기업구조조정위원장은 대우 임원들과 함께 일하면서 보고 들었던 것을 이렇게 전했다.
“98년부터 ‘정말 이렇게 가다간 문제가 심각해집니다’ 고 직언을 하는 임원이 몇 있었다고 해요. 몇 사람은 직언하러 혼자 들어가서 2시간 동안 논란을 벌이기도 했다는 얘기도 있었고. 하지만 마지막 순간 김 회장이 벌컥 화를 내면서 ‘야! 이 자식아 내가 알아서 한다는데 왜 말이 많아, 하라는 대로 해’, 그러면 할 수 없이 밀려나오고 그랬다는 거예요. 충언을 조금이라도 받아들였더라면….”
독단적인 경영 문화는 조직의 시스템을 갉아 먹어갔다. 김 회장의 목소리가 곧 시스템이었다. 대우에서 10년 넘게 일하다가 다른 대기업으로 옮긴 한 간부의 설명. 그는 직장을 옮긴 지 반년만에 대우의 구식 시뵀謗?대해 절감했다고 털어 놓았다.
“대우에 ‘자금조달’은 있었지만 ‘재무관리’는 없었습니다. 감사가 허술할 뿐더러 잘못한 게 나와도 대충 덮어주는 분위기였다고나 할까요. 그런 분위기에 익숙한 탓이었는지 회사를 옮긴 후 감사가 처음 나왔을 때 너무 당혹스러웠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
‘시스템 없는 대우’는 심볼 마크인 세계 경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도 묻어났다. 김 회장이 한번 점을 찍으면 비서실과 ㈜대우 상사부문이 뒤를 이었다. 그리고 플랜트와 자동차, 전자사업이 기러기 떼처럼 날아 갔다. 전직 대우 계열사의 한 임원이 전한 일화.
“유럽의 한 국가였어요. 자동차 사업권을 따려고 하는데 현지 정부에서 전자 공장도 같이 세우기를 원했습니다. 사업성에 관계 없이 대우전자도 ‘들러리 신세’가 돼서 나갈 수밖에요.”
화려한 세계 경영의 뒤편에 숨겨진 중구난방의 단면이다. 대우가 문제점을 발견하고 세계경영기획단이라는 관리 체제를 만든 것은 환부에 염증이 깊어지기 시작한 97년말이나 돼서 였다.
김 회장은 동유럽이나 제3세계권에 진출할 때 본인이 직접 현장에 가서 문제를 해결해 왔다. 대통령과 기업총수 등을 상대로 직접 담판했고, 그가 뜨면 모든 문제가 해결됐다. 덕분에 ‘정경유착의 세계 경영’이란 비판에 시달리기는 했지만….
김 회장은 많은 국가 원수들을 ‘친구’로 사귀었다. 특히 카리모프 우즈베키스탄 대통령와의 인연은 남달랐다. 중앙아시아 첫 완성차 업체인 ㈜우즈대우모터의 공장 준공식이 있던 날. 김회장은 기자들에게 카리모프에 대한 인상을 이렇게 말했다.
“카리모프를 보면 박정희 대통령 생각이 나요. 경제개발에 대한 의지가 박 대통령 못지 않습디다. 이런 나라라면 투자해도 아무 탈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사람과의 인연을 고리로 한 서방 진군은 생각처럼 과실을 가져오지 못했다. 폴란드 공장 외에는 목표에 미달이었다. 매년 판매량이 20∼30%씩 감소했? 인도공장은 대우의 자금위기가 깊어지면서 치유하기 힘든 지경으로 빠져들었다. ‘현지에서 돈을 벌어 현지에서 투자를 한다’는 것은 세계경영의 기본적인 자금 동원 구상. 그 철칙이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이다. 적자를 떼워야 했고, 이를 위해선 돈을 빌려야 했다. 신용도가 떨어진 상황에서 단기 자금을 잇따라 빌려 구멍난 곳을 메워야 했다. 지급보증으로 철저하게 얽혀져 있던 대우 현지 법인들은 연쇄적으로 문제를 일으켰다.
조금씩 허물어져간 거대 제국 대우의 모래성. ‘시운(時運)’이 없었던 것일까, 아니면 준비 안된 자의 자업자득이었을까.
입력시간 : 2005/06/20 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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