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밑을 앞둔 지난해 12월 말 영국 런던의 신금융가 캐너리워프. 금융사 주도로 버려진 항만을 재개발, 런던 동남부의 중심지구로 재탄생한 신금융지대는 오후 네시께 어둠이 찾아들자 다시 한 번 옷을 갈아입었다. 미국 은행의 대표격인 '시티타운'과 영국 대표 은행인 'HSBC타운'의 입구를 양대 축으로 240개 이상의 레스토랑·패션브랜드·금융사·호텔·전시관 등과 이어지는 지하 2층~지상 5층 규모의 캐너리워프 타운이 또 다른 태양이 뜬 양 거대한 인파에 휘말리며 한낮 이상의 활기를 이어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HSBC·바클레이스·로이드 등 영국 금융회사는 물론 씨티그룹·JP모건 등 글로벌 은행과 회계·법률법인, 신용평가사 피치 등과 빠짐없이 연결된 타운 내부를 걷다 보니 영국 금융이 창출해내는 복합적 부의 효과를 실감할 수 있었다. 금융위기와 은행들의 리보(Libor·런던은행 간 금리) 조작 등 스캔들로 한때 세계 최대 금융허브의 위상이 잠시 흔들리는 듯했지만 런던은 여전히 세계 금융의 중심지로 위상을 굳건히 지키고 있다.
◇이슬람과 중국을 안은 '시티 오브 런던'=금융허브와 관련해 영국 정부의 최대 관심은 이슬람 금융 및 중국 위안화 거래 유치다. 국제 금융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갈수록 커지는 두 금융권의 거래를 선점하겠다는 것이다.
영국은 올해 비이슬람 국가 중 최초로 2억파운드 규모의 이슬람 채권, 이른바 '수쿠크(Sukuk)'를 직접 발행할 예정이다. 수쿠크는 이자를 금지한 이슬람 율법에 따라 채권자들에게 자산투자 수익을 현금으로 지급하는 채권으로 이미 LSE(런던증권거래소)에만 340억달러 규모의 수쿠크가 상장돼 있다. 또한 약 25개의 영국 소재 법률회사가 관련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영국 금융 관련업 종합협회인 더시티UK의 줄리엣 캐리 홍보담당 전무는 "올해 채권 만기가 몰려 있는 이슬람 은행들이 돈 가뭄 해결을 위해 서구 은행과 파트너십 체결을 모색하고 있다"며 "런던의 이슬람 금융 허브화가 올해 급속히 추진될 것으로 전망된다"고 말했다.
런던은 위안화 허브 경쟁에서 앞서나가기 위한 노력도 하고 있다. 지난해 11월 런던은 중국 은행권과 은행 간 거래 규모를 보장하는 약정을 체결하고 중국 은행의 지점 설립을 허가한 것이다. 거래 규모 세계 4위에 해당하는 중국 내수 채권시장을 공략해 위안화 투자 수요에 부응하고 영국을 위안화 거래의 허브로 육성하겠다는 전략이다.
지난해 10월 중국을 방문했던 조지 오즈번 영국 재무장관은 "중국과 같은 위대한 국가의 통화는 국제통화가 돼야 한다"며 "런던이 중국 위안화의 '국제적 허브'가 되겠다"고 중국의 환심을 사는 데 열을 올리기도 했다.
◇'해가 지지 않는' 금융의 나라=세간의 뇌리에서 희미해졌지만 영국은 지난 1976년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구제금융을 받아야 했던 뼈아픈 기억이 있다. 우리에게 영국은 말하자면 'IMF 구제금융' 제도의 20년 선배쯤 되는 셈이다. 산업혁명 종주국에서 조선·자동차·철강 등 각종 기간산업을 팔아치워야 하는 신세가 됐던 영국은 당시 금융 서비스와 문화 산업을 국가 기간산업으로 재육성, '해가 지지 않는 나라'의 전통을 일신했다. 한 금융권 관계자는 "금융을 지배한다면 산업적 지배 이상의 효과가 나타남을 일찌감치 간파했기 때문"이라고 귀띔했다.
이 같은 영국 금융이 일궈낸 성과는 한마디로 눈부시다.
현재 영국 금융은 활발한 국가 간 거래로 전세계 채권유통의 70%, 파생상품 유통의 49%, 해외증권 유통의 41%, 국가 간 은행 대출의 20%를 책임지며 이들 분야에서 부동의 글로벌 1위를 지키고 있다. 외환 유통량은 2013년 4월 현재 하루 평균 2조7,260억달러로 미국의 두 배, 기타 유럽연합(EU) 국가 총합의 두 배에 달한다. 글로벌 외환 트레이더들에게 '런던 오후 네시'는 환거래의 표준시로 일컬어지고 있다.
영국 금융이 창출하는 고용 및 유관 효과 역시 화려하다. 영국 금융은 지난해 기준으로 영국 국내총생산(GDP)의 8.6%, 세수의 12%, 고용의 7%를 책임진다. 금융업체 종사 인력 100만여명 중 3분의2는 런던 외곽에 거주, 부의 분산 효과도 나타내고 있다. 수도 런던의 전체 고용인구의 15%를 금융과 금융 유관 전문 서비스 부문이 전담하고 있는 것을 비롯해 맨체스터·에든버러·브리스틀·리즈·카디프·버밍햄 등 총 7개 지역의 금융 관계산업 고용인구가 지역 전체 고용의 10%를 넘고 있다.
◇유일한 글로벌 금융허브=런던 금융시장의 오늘은 현존하는 유일의 '글로벌 금융허브'로 요약된다. 미국·일본 금융시장이 자국 내 금융자산 거래를 바탕으로 이뤄지고 싱가포르·홍콩허브가 아시아·중국의 역외 자본 통로로 이용된다면 런던은 명실공히 전세계 자금이 한데 모이는 유일한 글로벌 허브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브라이언 크레스 영국 시티공사의 글로벌부문 수석 매니저는 "영국 금융의 글로벌화는 상대적으로 작은 내수시장을 극복하기 위한 최적의 선택"이라며 "미국과 아시아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 지리적 특성과 국제 공용어인 영어의 종주국, 오랜 금융 역사만으로는 영국 시장의 강점을 다 설명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실제 영국의 개인 펀드시장 규모는 지난해 말 기준 9,860억달러로 미국(13조450억달러)의 10분의1도 안 된다. 런던 은행의 총자산 역시 중국·미국·일본에 이은 4위 규모다. 그러나 입점 외국 은행 수는 251개로 전세계 금융허브 중 가장 많다. 회계·법률·자문·컨설팅 등 금융 전문 서비스 회사까지 합하면 80여개 국적의 1,400여개 업체가 영국에 둥지를 틀고 있다. 이들 외국계 회사는 영국 금융이 창출하는 전체 부의 절반을 만들어낸다. 전체 금융 부문의 무역수지 흑자도 640억달러로 미국(200억달러)의 3배에 달한다. 전세계에서 모여든 금융회사와 기업들이 영국의 국부창출에 주요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찰스 굿하트 런던정경대(LSE) 명예교수는 "금융위기 이후 영국 금융은 '규모의 경제' 창출에 성공하며 입지를 높여가고 있어 유로존(유로화 사용 18개국)과의 경제 격차를 벌리는 주요 요인이 되고 있다"며 "영국의 글로벌 전략은 내수시장이 협소한 한국 금융 시장에 특히 시사하는 바가 클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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