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준 만나 시대 앞서는 영감에 자극받아 귀국 후 페미니즘·전위예술 전시 기획
'쌈지스페이스' 등 대안 문화공간도 개척
비주류·소외계층 아우르는 전시가 목표
다문화 조망 '유니버설 스튜디오' 등 계획
독립 큐레이터이자 대안공간 운영자이던 '비주류 독립군'이 굵직한 비엔날레를 섭렵한 뒤 '중심부 제도권'으로 파고들어 서울시립미술관의 수장이 됐다. 게릴라이던 쿠바 혁명가 체 게바라가 재무장관이 된 것에 빗댈 수 있을까.
김홍희(66·사진) 서울시립미술관장이 뉴욕에 첫발을 내디딘 때는 서른을 훌쩍 넘긴 1979년 4월. 그는 애 딸린 엄마였으며, 청와대 비서실 행정관을 지낸 남편 천호선씨가 뉴욕 총영사관 한국문화원 문정관으로 발령 났다는 사실 외에 뉴욕행의 다른 의도(?)는 전혀 없었다. 현대미술의 천국인 뉴욕에서, 그것도 뉴욕문화원 창설의 임무를 띤 남편 곁에 있다 보니 미술관은 필수 코스. 그런데 충격적이었다. 피카소와 마티스 정도를 제외하면 아는 작품이 없었다. 물감 뿌리기 기법으로 액션페인팅과 추상표현주의를 이끈 잭슨 폴록의 그림이나 마오쩌둥, 마릴린 먼로의 이미지와 수프 깡통을 마구 나열하는 앤디 워홀의 작품은 본 것도 들은 것도 처음이었다. '너무 모르는' 자신이 답답해 맨해튼 헌터칼리지에서 미술사 공부를 시작한 그해 가을은 이화여대 불문과를 졸업한 지 10년 되던 때였다.
이듬해 현대무용가 머스 커닝햄의 후원회장인 바버라 툴을 따라 실험예술공간 '키친'을 처음 방문한 날은 백남준이 레코드판과 바이올린을 깨부수는 퍼포먼스가 열리고 있었다. 깨진 레코드판과 바이올린 조각을 주워 모아 백남준에게 사인을 부탁했더니 흔쾌히 사인하며 스튜디오로 찾아오라고 초대했다. "미세스 천(김홍희)은 검은색만 입고 다니지만 흰색도 잘 어울릴 텐데…뉴욕 멋쟁이들은 안경도 옷마다 색깔 맞춰 쓴다고!" 소소한 패션도 참견할 정도의 친구가 된 백남준은 그러나 "앞으로 전자예술(Electronic Art)을 내다봤기에 비디오아트를 하게 됐다. 전자제품이 상당한 부를 가져다줄 것이기 때문에 그것으로 미술을 한다면 마찬가지로 크게 성공할 것"이라고, 어눌한 말투지만 시대를 앞서간 얘기로 김 관장을 일깨웠다.늦은 나이에 미술계로 뛰어들었지만 최첨단 경향을 가장 빠르게 흡수한 김 관장은 비주류 독립 큐레이터에서 시립미술관장이 됐고 지난해 아시아인으로 유일하게 2017년 카셀도큐멘타(최고 권위의 5년제 국제미술제) 감독 선정위원을 맡으며 '미술계의 살아 있는 전설'이 됐다. 그의 행적만 좇아도 한국 현대미술을 얼추 파악할 수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1992년에 귀국했는데 마침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백남준 선생의 개인전과 함께 관련 심포지엄이 열렸어요. 백 선생이 무명이던 나를 발제자로 초청해 '한국 페미니즘 미술의 전망'에 대해 정식으로 발표할 기회를 얻었는데, 페미니즘 미술에 대한 인식조차 없던 시절이었기에 크게 주목받았어요."
그때부터 김 관장의 '최초' 열전이 시작됐다. 1993년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개관 기념으로 '서울 플럭서스 페스티벌'을 기획했다. '변화' '움직임'을 뜻하는 플럭서스(Fluxus)는 1970년대의 국제적인 전위예술운동으로 그 중심에 있었던 백남준은 "한국이 일본보다 먼저 플럭서스 페스티벌을 주최해서…우리가 일본보다 어느 면에서 더 앞선다는 뜻이 된다"고 당시 행사 서문을 썼을 정도다. 이어 1994년 한국미술관에서 열린 '여성, 그 다름과 힘'은 국내 첫 페미니즘 전시였다.
광주비엔날레가 처음 열린 1995년에 관련 특별전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미디어아트 기획전인 '인포아트(info ART)'의 큐레이터로 활동했다. 평면회화 일색이던 한국 화단의 주변 예술이던 테크놀로지와 페미니즘을 소개한 김 관장은 전위미술의 표상이 됐고 미술계의 관심과 배척을 동시에 받았다. 새로운 시도는 이뿐이 아니었다.
"시동생이 '쌈지'라는 패션 브랜드 사업을 시작했는데, 내가 예술과의 접목을 제안해 매장을 예술을 소개하는 공간으로 활용했어요. 그러다 1998년에 암사동의 쌈지 옛 사옥을 레지던시(작가의 창작 및 교류를 목적으로 한 거주 프로그램)로 이용하기 시작했고 2000년에는 홍대앞에 건물을 사 '쌈지스페이스'라는 대안적 개념의 복합문화공간을 운영하기 시작했죠."
제대로 된 레지던시도, 본격적인 대안공간도 그가 '개척 세대'였다. 대안공간이란 갤러리의 상업적 목적성을 배제하고 미술관의 권위에 안주하지 않는 대안적 미술공간으로 실험적인 신진 작가 발굴을 주도해 이후 한국 현대미술의 호황기를 이끈 초석이 됐다. 그때부터, 나이는 쉰을 넘기고 세기는 21세기로 넘어간 그때부터 김 관장은 날개 달린 듯 활동의 폭을 넓혀갔다. 나이도 국적도 무색했다.
"2000년에 광주비엔날레 커미셔너가 됐고 2003년에는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커미셔너로 선정됐고요. 2006년에는 광주비엔날레 총감독이 됐는데 첫 여성 총감독이었죠. 그랬더니 김문수 도지사가 경기도미술관을 준비한다며 그쪽으로부터 제안을 받았어요. 처음 공공미술관과 인연을 맺은 계기였죠."
그가 이끈 경기도미술관은 수준 높은 컬렉션(소장품)과 창의적인 기획전으로 뿌리를 내렸고 이어 김 관장은 2012년 서울시립미술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따지고 보면 뮤지엄(museum)은 제국주의 승전 기념물 수집과 인연이 깊어 전통적 미술관은 엘리트와 백인 남성 혹은 소수 부유층을 중심으로 발전해온 게 사실이다. 김 관장은 이를 깨고 '포스트 뮤지엄(Post Museum)' 시대를 제안한다.
"그간 미술관이 작품 위주였다면 이제는 미술관이 사람을 위한 공간이자 소셜네트워크의 기관이어야 합니다. 작품의 미학적·자산적 가치보다 그 작품이 '어떻게 관계를 맺는지' 관객 중심에서 전시해야 합니다. 하지만 관객 눈높이에 맞춘답시고 전시 수준을 낮추는 일은 절대 안 되죠. 좋은 작품과 좋은 전시로 시민들의 미감을 끌어올려야 합니다. 친절한 해설과 설명이 필수고 도슨트(전시해설사) 역할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저변을 확대함으로써 현대미술을 보급해야 합니다. 낮출 것은 미술관의 문턱인데, 시민들이 많이 방문하게끔 대중 이벤트를 기획한 것 중 하나가 '예술가의 런치박스'죠. 작가와 함께 간단한 식사를 하면서 작품 얘기를 듣고, 전시를 더 보는 것은 각자의 선택이지만 일단 미술관 잠재 관객이 되는 거거든요."
김 관장이 부임한 후 개최된 '팀 버튼'전에는 50만명이 다녀갔다. 미술이 영화와 패션에까지 눈을 넓히고 비주류·제3세계·여성·소외계층 등 못 보던 부분까지 아우르며 보통 사람들을 위한 공간으로 미술관을 확장시키는 게 그의 포스트 뮤지엄이 지향하는 바다. 이에 올해는 다문화사회를 조망하며 국내 거주 외국 작가들의 시선을 보여주는 '유니버설 스튜디오(가제)' 전시나 지식정보사회의 오류를 고찰한 '오작동 라이브러리'전, 연말로 예정된 '글로벌 아프리카(가제)'전 등 쉼 없는 재조명과 재평가를 통해 대중을 깨울 참이다.
"마침 우리 미술관은 미디어아트 비엔날레인 '미디어시티서울'(9월2일~11월23일)을 개최해온 터라, 위탁경영이던 것을 직영 체제로 바꿨고 거대도시·첨단도시 서울의 특성을 보여주게끔 자리 잡게 할 겁니다. 난지 레지던시도 국제 레지던시로 바꿔 24개방 중 4개는 3개월씩 연간 16명의 외국 작가가 이용하며 국내 작가들과 교류할 수 있게 마련했죠. 미술관이 이렇게 노력하지만 현대미술은 '어렵습니다'. 그래도 광주비엔날레가 10년 이상 열렸더니 동양화만 인정하던 광주 시민들이 쓰레기더미를 보고도 설치미술이라고 하더라네요. 관객들도 현대미술을 알기 위해 전시장도 자주 찾아가고 공부도 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미술관의 대중화 의지와 관객들의 학습 노력이 만나는 지점에서 더 큰 효과가 날 것이라 기대합니다."
연임된 김 관장은 2016년까지 미술관을 이끌며 정체성을 다질 예정이다. /
She is… △ 2006년 광주비엔날레 총감독 △ 2006~2010년 경기도미술관 관장 △ 2012~현재 서울시립미술관 관장 △ 2013년 카셀도큐멘타 예술감독 선정위원 ◇수상 △ 1996년 대통령표창(광주비엔날레 전문위원 자격) △ 2003년 석주미술상 평론부문 수상 △ 2007년 옥관문화훈장(광주비엔날레 총감독 자격) |
■김 관장 운영계획은 공간별 특성화 |
·사진 이호재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