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 휴전, 큰 전쟁을 멈춘 작은 평화, 미하엘 유르크스 지음, 예지 펴냄<br>1914년 장교들 협박 불구 영화같은 휴전<br>죽은 동료 시신 치우며 친구처럼 한달 생활
| 1914년 크리스마스에 영국군과 독일군 장교들이 만났던 모습을 담은 사진들은 각종 신문에 실려 영국을 떠들썩하게 했다. 담배를 문채 카메라를 응시하는 독일군 병사는 놀랍게도 영국 병사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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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 '데일리 미러'지 1915년 1월 8일자 1면에 '역사적인 집단:역국과 독일 병사들이 함께 사진 찍다'란 제목으로 게재된 사진은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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英·獨 병사들 성탄절에 총을 놓다
크리스마스 휴전, 큰 전쟁을 멈춘 작은 평화, 미하엘 유르크스 지음, 예지 펴냄1914년 장교들 협박 불구 영화같은 휴전죽은 동료 시신 치우며 친구처럼 한달 생활
홍병문 기자 hbm@sed.co.kr
1914년 크리스마스에 영국군과 독일군 장교들이 만났던 모습을 담은 사진들은 각종 신문에 실려 영국을 떠들썩하게 했다. 담배를 문채 카메라를 응시하는 독일군 병사는 놀랍게도 영국 병사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영국 '데일리 미러'지 1915년 1월 8일자 1면에 '역사적인 집단:역국과 독일 병사들이 함께 사진 찍다'란 제목으로 게재된 사진은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
1914년 12월 독일 서부전선 플뢰르베(Fleurbaix) 벌판. 이와 쥐들이 들끓는 참호 속에서 크리스마스 이브를 맞은 영국군 병사들에게 상상치 못한 노래 가락 소리가 들려왔다.
“고요한 밤, 거룩한 밤… .” 차가운 겨울 장맛비로 무릎까지 뒤덮은 오물 투성이 진흙 참호 안에서 영국군 병사들은 자기의 귀를 의심해야 했다. 노래가 끝난 후 독일군 참호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더욱 믿을 수 없는 것이었다.
“우린 쏘지 않겠다(We not shoot). 너희도 쏘지 마라(You not shoot).”
얕은 술책이 아니었다. 두 진영 참호 사이 이른바 무인지대에 널부러진 영국군 전사자의 장례를 치러주겠다는 제의였다. 1차 세계 대전의 피비린내 나는 격전지 서부전선에서 벌어진 한편의 동화 같은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됐다.
그 동안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눴던 영국군과 독일군 말단 병사들은 다음날인 크리스마스에 총을 내려놓고 휴전을 결정했다. 장교들의 협박과 엄청난 여론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마치 동네 친구들처럼 담소를 즐기고 생필품을 나누며 한달 가까이 휴전을 유지했다.
크리스마스에 시작된 이 플뢰르베 벌판의 휴전은 서부전선 곳곳으로 퍼졌다. 심지어 “어느 전선에선 독일 측 작센군이 스코틀랜드 군과 축구 경기를 벌여 작센군이 3:2로 이겼다”는 소문까지 났다. 믿기 어려운 이 축구 경기는 사실이었다.
2001년 젊은 미국인 영화감독 리애너 크릴은 이 특별한 경기를 소재로 단편 영화까지 선보였고 프랑스 영화감독 크리스티앙 까리용(Christian Carion)은 올해 이 이야기를 바탕으로 ‘메리 크리스마스’(Joyeux Noel)이란 장편 영화를 만들었다.
이 책은 말 그대로 한 편의 영화같은 ‘전쟁 속 평화’ 이야기를 추적한 기록물이다. 독일 시사 주간지 슈테른과 잡지 템포의 편집장으로 일했던 미하엘 유르크스는 치밀한 현지 조사와 참전자 자손과의 면담을 통해 마치 전설처럼 전해 내려오는 크리스마스 휴전 이야기를 한 편의 다큐멘터리 영화처럼 복원해냈다.
1914년 7월 시작된 제1차 세계대전은 유럽 대륙을 살육 전장으로 뒤바꿔 놓았다.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Erich Remarque)의 소설 ‘서부전선 이상없다’(Im Westen nichts Neues)에서 적나라하게 묘사된 이 비인간적인 전쟁의 한 귀퉁이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려는 젊은 병사들의 절박한 몸짓은 진한 감동을 이끌어낸다.
죽은 동료 병사의 시신을 거둬주면서 시작된 크리스마스 휴전은 적과 아군의 구분을 허물어뜨렸다. 적과 함께 동료를 묻으면서 그들은 서로에게서 자신의 얼굴을 발견했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떠나온 집을 그리워하고 어두운 진지 속에서 날아오는 총탄에 공포를 느끼는 적의 모습은 바로 거울에 비친 자기 자신이었다.
“도대체 우리가 왜 서로를 향해 총을 쏘아야 하는가.”
저자는 수십년동안 수많은 책과 영화의 소재로 이용됐던 이 실화를 그저 동화 속 기적같은 이야기로 묘사하는데 그치지 않는다. 1914년 8월 14일자 영국 사회주의 주간지 ‘뉴 스테이츠먼’에 실린 조지 버나드 쇼의 “모든 부대의 병사들은 장교를 총으로 쏘고 집에 돌아가야 한다’는 주장을 인용한 대목에서는 저자의 분명한 의도가 느껴진다.
유럽 왕가들의 제국주의적 팽창 야욕 희생물로 전락하기를 거부한 이들 병사를 통해 저자는 인간의 존엄성을 상기시키려 하고 있다.
마지막 장 소제목으로 사용된 미국 정치인 벤자민 프랭클린의 말은 이 책의 주제를 더욱 명확하게 드러낸다. “좋은 전쟁이란 없다. 그리고 나쁜 평화란 없다.”
입력시간 : 2005/12/23 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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