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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이 전쟁의 전설로 기억되는 미케네인. 그들은 사자 문장(紋章)과 전투 마차를 좋아하는 우락부락한'근육질 문명'의 주인공으로 기원전 약 1800년에서 기원전 1100년 사이 번성했다. 이들의 전성기를 뒷받침한 것은 다름아닌 농업이었다. 빵을 만들 밀과 맥주를 담글 보리를 재배했고, 젖을 얻기 위해 염소와 양도 키웠다. 작은 농장에서 다양한 생명을 키우며 풍요로운 삶을 이어나갔다. 이후 시간이 지나면서 어떤 농부들은 자신의 농토가 포도 재배에 적합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온화한 날씨가 이어지자 이들은 삼림을 벌목하고 미개간지를 경작해 포도밭을 넓혀나갔다. 이제는 포도주를 담가 다른 물품과 교환하며 이익을 더욱 늘려 나갔다. 교역으로 돈을 벌기 시작하자 농장은 보다 특화됐다. 미케네인들의 풍요로움은 극에 달했다. 그러나 오래도록 승승장구할 것 같았던 이들은 돌연 종말을 맞이하게 된다. 도대체 이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아리스토텔레스는 미케네 문명의 모습을 추측하며 기록을 남겼다. 기후가 건조해지면서 미케네는 산출이 적은 마른 땅으로 변했고, 특화된 농장들은 자연 회복력을 잃어버리고 황무지가 됐다. 교역으로 바꿀 것이 없어지자 자급자족이 불가능해진 문명 역시 이내 쇠퇴의 길을 걷게 됐다.
정치 제도가 발달했던 로마는 기후조차 좋은 축복의 땅이었다. 따뜻한 날씨 덕분에 곡물 농사는 항상 풍년이었고 포도밭과 올리브 농장마다 과실이 주렁주렁 맺혔다. 그러나 운명이 뒤바뀐 건 약 서기 300년. 이때 닥친 혹한에 강우량이 줄고 작물 재배 면적이 줄어들면서 곡물 수확량은 감소하고 로마 문명은 한 순간에 몰락의 길을 걷게 됐다.
미케네와 로마, 두 사례 모두 식량이 문명의 흥망성쇠를 좌우한 배후였다는 공통점이 있다. 문명은 식량이 있는 곳에서 싹텄고, 식량난이 심해지면 문명도 멸망의 길로 접어들었다는 것이다. 미국의 농경학자 에번 프레이저와 저널리스트 앤드루 리마스는 16세기 피렌체 상인이자 세계 무역여행을 기록한 최초의 유럽인 프란체스코 카를레티의 15년에 걸친 세계 일주를 따라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인류가 땅에 기르고 사냥하며 교역해온'먹을 거리'에 관한 이야기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도시국가, 근대 대영제국에서부터 현대 미국과 몸살을 앓고 있는 중국의 곡창지대 모습까지 음식이 인간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짚어 나간다. 이 과정에서 지구의 토양이 비옥하다는 낙관, 앞으로도 온화한 기후가 지속될 거라는 낙관, 단일작물의 대량 생산에 대한 낙관, 값싼 화석 연료가 영구히 제공될 거라는 낙관 등 풍족한 당시의 식탁을 맹목적으로 낙관하는 데서 음식 제국의 흥망성쇠가 결정된다는 공통점을 이끌어낸다.
저자는 21세기 오늘날에도 식량의 위기는 예외가 아니라고 강조하며'지속 가능한 농업'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다년생 작물을 심어 자연 상태의 다양성을 보장하고, 기계 대신 사람의 근력을 사용해 한정된 석유 자원 의존도를 줄이는 방안 등을 소개한다. 저자는 또, 안정적인 식품 공급이 유지되기 위한 조건으로'생물지역주의'를 예로 든다. 이는 생산물의 지역 판매를 말하는 것으로, 다양성을 갖춘 농장이 소비자에게서 멀지 않은 곳에 자리잡도록 해 교역로의 거리를 줄이고 유통 시간을 단축함으로써 잉여 식량을 늘려야 한다는 설명이다. 저자는 이 같은 대안들이 적절한 조화를 이룰 때 애그플레이션을 비롯해 각종 식량난을 잘 극복하고, 현대 식품 제국을 오래도록 유지할 수 있다고 역설한다. 2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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