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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나영 기자의 1일1식(識)] <175> 유교자본주의와 절대권력


한때 우리나라 사회학자들이 ‘유교 자본주의’라는 개념에 대해 연구한 적이 있다. 유교는 효(孝)와 예(禮)를 중심으로 한 사상이다. 그런데 한국, 중국, 일본 등의 문화권에서는 이 개념이 집안뿐만 아니라 기업과 국가에서도 적용된다. 예를 들어 왕조시대에 나라의 지도자는 ‘만백성의 어버이’처럼 표현됐다. 국민들을 먹여 살리고, 그들이 올바르게 살아갈 수 있도록 터전을 마련해 주는 ‘가장’ 역할을 했던 것이다. 일본 고전에서도 임금 또는 천황을 뜻하는 ‘기미’(君)는 아버지(父)와 동일시되곤 했다. 이러한 일련의 정서는 기업이라는 조직 안에서 구성원들이 사주(社主)를 대할 때에도 똑같이 적용됐다. 경영주는 자신의 구성원들을 ‘우리 가족(家族)’이라고 부르고, 그 스스로도 조직원들에게 아버지 같은 존재로 여겨졌다.

효도나 예의와 같은 사적인 정서는 사람 간의 관계를 매우 불분명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서양 사회의 관계는 계약과 보상이 핵심이다. 특정한 조건을 내건 약속이 인간관계의 본질이라는 의미다. 그러나 한국을 비롯한 동양 문화권에서는 법적, 제도적으로 계약이 있을지언정 인간 행동 자체는 ‘도리’나 ‘염치’와 같은 주관적인 기준으로 판단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때에 따라서는 윗사람 또는 힘 있는 사람이 어떤 개인의 행위를 정성적으로 평가하더라도 법 못지 않은 위력을 가지기도 한다. ‘찍히면 죽는다’는 말은 거기서 비롯됐다. 높은 사람에게 한 번 부정적인 평가를 받으면, 그 부정적 인상을 원점으로 되돌리기 어렵다는 의미다. 그래서 아랫사람은 그에게 ‘도리’를 다 하기 위해 끊임없이 비위를 맞추고, 경우에 따라서는 충성을 맹세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철학자 헤겔은 이런 감성적 요소가 지배하는 동양 사회의 윤리를 조금 미숙한 것이라고 보았다. 법과 상식에 기초한 판단이 사회를 통제해야 하는데, 힘 센 사람의 개인적 정서가 상황을 뒤바꾸는 건 문제라는 것이다. 헤겔의 생각은 훗날 동양의 경제 전문가들이 ‘근대화란 무엇인가’를 주제로 토론하는 데에 영향을 미쳤다. 근대화란, 모든 전근대적인 것, 예를 들면 힘센 사람의 관습법에 의해 질서가 좌우되는 모든 것을 타파하는 작업이었다.



그러나 열심히 ‘근대화’, ‘현대화’를 해도 아직까지 우리 사회는 유교적인 정서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것 같다. 특히 기업 관련 소식을 접할 때 더욱 그 현실이 명확해 진다. 그룹사 내부에 갈등이 일어나거나 분규가 발생하면 제일 먼저 주목해야 하는 것은 ‘회장님의 뜻’이다. 집단 의사결정을 위한 이사회 또는 전문 경영인들의 사장단협의회 등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등기이사로 올라 있지도 않은 오너가 무소불위의 권력을 발휘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들의 영향력이 큰 건 단순히 자본 때문만은 아니다, 그들을 가능케 하는 권위, 즉 유교적 차원의 존경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들의 강한 힘과 카리스마는 조직이 위기를 극복할 때에 중요한 원동력이 됐다. 불필요한 자원 낭비를 막고 역량을 하나로 집중하는 효과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때에 따라서는 공식화되어야 할 의사결정을 밀실화했던 것도 사실이고, 그 때문에 지위를 후세에 물려줄 때 상당 부분 부담이 따랐던 것도 맞다. 특정인이 암묵적으로 주도하던 ‘힘’을 누구나 납득할 수 있는 방식으로 다음 세대에 이양하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요즘 들어 우리 사회를 대표하는 기업들에 크고 작은 일들이 연달아 일어나고 있다. 분쟁의 당사자들도 처음에는 ‘잘 해보려고’ 했던 일이 변질된 데 대한 유감이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국민은 알고 있다. 이제는 우리 기업이 ‘높은 분’의 입에만 주목하는 후진적인 자본주의 행태에서 벗어나 제대로 된 자본주의가 뭔지 깊이 고민해봐야 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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