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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 아침에] 대통령의 여백

전두환은 경제에 빈자리 뒀고 YS는 인재에 머리를 빌렸는데


지난 1980년 어느 날 지금은 고인(故人)이 된 장욱진 화백이 그림 한 장을 들고 지인을 찾았다. 장 화백이 서양화가이기에 지인은 당연히 그가 들고 온 그림 역시 당연히 유화일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그가 보여준 것은 뜻밖에도 먹으로 그린 동양화였다. 빛바랜 누런 종이에 그려진 산과 폭포, 배를 탄 사람 그리고 집과 닭…. 간단한 선 몇 개만으로 묘사한 수묵화를 보고 지인은 '평화로운 삶의 여유' '서양화에서는 볼 수 없는 아름다움'이라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초조하게 그의 표정을 바라보던 노화백의 얼굴에는 비로소 여백의 아름다움을 찾았다는 희열이 묻어났다.

여백의 아름다움을 본 예술가가 어디 장욱진뿐일까. 낙엽 한 잎 위에 흰색 물감으로 물방울 하나를 찍은 김창렬 화백, 커다랗고 하얀 캔버스 위에 큰 점 하나만 남긴 단색화 작가 이우환 화백 역시 빈 공간을 통해 사색의 여유를 갖게 하는 명인들이다. 이뿐 아니다. 소금을 만들기 위해서는 바닷물을 햇볕에 양보해야 하고 맛있는 밥을 지으려 해도 뜸들이는 시간을 둬야 한다. '비우지 않으면 새것이 들어설 수 없다'는 법정 스님의 말은 이래서 옳다.

우리 대통령 중에도 비움을 미덕으로 삼는 이들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12·12쿠데타로 등장한 전두환 전 대통령은 정치는 자신의 손에서 놓지 않았지만 경제에 관해서는 여백을 뒀던 정치인이었다. 전 전 대통령이 빈자리를 맡겼던 인물이 김재익 전 청와대 경제수석. "경제는 임자가 대통령이야"라는 유명한 일화는 이때 나왔다. 얼마 전 서거한 김영삼 전 대통령은 평소 '머리는 빌리면 된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이를 두고 문민정부 출범을 YS와 함께했던 한완상 전 통일부총리는 한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YS는 여백의 인간이다. 여백이 많으니 좋은 사람의 아이디어를 얻어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대한민국 정계를 관통하는 YS의 인맥 파워는 바로 여백의 힘에서 비롯한다.

그렇다면 박근혜 대통령에게 여백은 어떤 의미일까. 한나라당 대표 시절 박 대통령은 백지를 그냥 버리는 것이 너무 아까워 국회에서 나눠준 자료집의 빈 종이를 메모지로 썼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알뜰하고 검소한 삶'을 묘사한 이 내용이 오히려 '빈 공간은 불필요한 곳'으로 인식한다고 느껴진 것은 혼자만의 착각일까. 이후 빼곡한 수첩, 꼭 다문 입술, 옆에 있으면 베일 것 같은 손 칼날을 보여준 대통령의 모습은 분명 여유와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요즘 정가에 화제가 되고 있는 한 마디가 있다. "그럼 저는 믿고 갑니다." 박 대통령이 최근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는 유엔 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 참석차 출국하면서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와 원유철 원내대표에게 한중 자유무역협정(FTA)과 관련해 남긴 말이다. 진짜 믿고 떠난다기보다 꼭 처리하라는 무언의 압력이었으리라. 이 말을 들은 이들이 여유를 느낄 겨를이 있었을까. '배신의 정치'로 하루아침에 유승민 의원을 원내대표 자리에서 끌어내리고 '진실한 사람'으로 공천의 방향을 확실히 각인시킨 대통령으로부터 '립서비스' '직무유기' '위선' 같은 험한 말을 들은 뒤인데 등에서 땀이 흐르지 않았을까. 어쩌면 2008년 소위 '친박(親朴) 공천학살' 이후 총선에서 친박연대에 무릎 꿇은 '친이(親李) 참변'의 악몽이 떠올랐을지도 모른다. 대통령 의지의 관철이 절실하니 새누리당이 어떻게든 한중 FTA를 처리하려 달려들었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이러니 비준안을 통과시키면서 '상생협력기금 1조원'이라는 해괴한 괴물을 만들어낼 수밖에.

취임 후 박 대통령에게는 언젠가부터 항상 따라다니는 꼬리표가 하나 생겼다. '불통(不通)'. 모든 것을 채워놓았으니 통한 공간이 없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게 3년이 지나갔다. 이제는 통해야 한다. 대통령의 것을 내려놓고 주위를 둘러볼 여유의 시간을 가져도 되지 않겠나. 그래야 국민의 소리도 귀에 들어오고 야당도 눈에 들어올 수 있다. 채우기 위해서는 먼저 비워야 하는 것이 순리다.

/송영규 논설위원 skong@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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