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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 Watch] 자본주의 축제장의 하이에나, 기업 '약한 고리'를 물어뜯다

진화하는 주총꾼… 피라미드형 조직화

경영권 분쟁·배당 등 언론 주목받는 기업 집중공격

IR담당자 "주주라는데…" 고성·난동에도 속수무책

일부 주총꾼 피해 지방서 열거나 같은날 개최하기도

떡값명목 수십만원 '뒷돈 지급관행







# 서울 강남에 본사를 둔 한 코스닥 상장사의 IR 담당자는 작년 주주총회를 떠올리면 한숨부터 나온다. 당시 주총을 며칠 앞둔 어느 날 양손에 쇼핑백을 들고 회사로 찾아온 한 주주는 대뜸 “명절 때 고향에 갈 차비를 달라”고 요구했다. “아무리 주주라도 돈을 드릴 수는 없다”고 정중히 거절했지만 막무가내였다. ”내가 주주인데 그 정도도 못 해주나. 이런 식으로 나오면 주총을 방해하겠다”며 사무실이 떠나가라 큰 소리를 쳤던 것. 거듭된 요구에 계속 응하지 않자 이 주주는 가지고 온 쇼핑백을 열며 “돈을 못 주겠으며 내가 판매하는 상품이라도 사라”고 본색을 드러냈다. 헛웃음만 나왔다.

3월 주주총회 시즌을 앞두고 상장사 IR 담당자들은 벌써 머리가 아프다. 자본주의 축제가 돼야 할 주주총회가 매년 반복되는 ‘주총꾼’들의 횡포에 치가 떨리지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신세가 답답할 뿐이다. 주총꾼들의 행태는 과거나 현재나 큰 변화가 없다. 통상 주주명부가 폐쇄되기 전에 의도적으로 1~10주 정도의 적은 주식을 사들인 후 주총 며칠 전이나 주총 당일 회사에 나타나 “주총을 조용히 넘기려면 돈을 달라”고 요구하는 방식이다. 요구하는 금액은 기업의 규모에 따라 다르다. 비교적 규모가 작은 코스닥 상장사의 경우 5만원 내외, 규모가 큰 코스피 상장사의 경우는 10만~50만원 수준이다. 큰 탈없이 주총을 넘기기 위해 회사 측이 줄 경우에도 자신이 원한 것 보다 부족할 경우 이들은 주총장에서 고성을 지르거나 안건과 무관한 발언을 오랜 시간 이어가 주총을 방해한다.

최근에는 주총꾼들이 조직화되고 있다. 피라미드 형태처럼 A등급의 주총꾼 아래에 여러 명의 B등급 주총꾼, 그 밑에 다시 C등급 주총꾼들로 팀을 구성해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것이다. A등급의 주총꾼들은 같은 주총장에 나타나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 사전에 권역을 나누기도 한다. 이들이 주요 타깃으로 삼는 기업들은 주로 교통이 편리한 서울에서 주총을 여는 상장사들이다. 지리적 조건 외에도 경영권 분쟁이 생긴 기업이나, 배당 등과 관련해 언론의 주목을 받는 기업들을 주로 노린다. 워낙 규모가 크고, 그야말로 ‘선수’들이다 보니 A급 주총꾼은 기업들에게 공포의 대상이다. 주총꾼들의 ‘단골 고객’으로 소문난 A사의 경우 이런 고리를 끊기 위해 지난해 주총 때 과감하게 뒷돈을 거절했다. 타격은 예상보다 컸다. 주총은 예상 보다 무려 4배 넘게 길어졌고, 주총 현장은 고성과 난동으로 얼룩졌다.

한 상장사 관계자는 “주총꾼들은 주총 진행 방식은 물론 안건으로 올라온 내용에 대해서도 꼼꼼히 공부를 하고 온다”며 “어떤 주총꾼은 국회의원의 필리버스터를 연상시킬 정도로 수십분 동안 장황한 연설을 해 주총을 방해하기도 한다”고 전했다. 또 다른 코스닥 상장사의 IR 담당자는 “업계에서 악명 높은 한 주총꾼의 자녀 결혼식장에 갔더니 상장사들의 주식담당자들만 가득했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까지 돌 정도”라며 “어떤 회사에서는 소란을 피운 주총꾼을 강제로 끌어낸 회사 직원이 폭행죄로 고소를 당하고 벌금형을 받아 졸지에 전과자 신세가 된 경우도 있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한 중소기업의 IR 담당자는 “대표 등 사내이사들이 참가하는 주총이 시끄럽게 진행되면 결국 IR 담당자들만 골치 아프기 때문에 돈을 줘서 보내는 방식을 취하는 것”이라며 “소란스러워져 언론에 오르내리거나 투자자들 사이에서 괜한 헛소문이 도는 것을 방지하고 싶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문제는 일부 주총꾼들 때문에 선의의 주주들이 피해를 입는 점이다. 상장사들은 주총꾼의 접근을 막기 위해 다른 기업과 같은 날짜에 ‘겹치기 주총’을 개최하는 일이 많다. 주총꾼을 분산시키기 위해 주총이 많이 열리는 3월의 금요일 오전 9시나 10시, 일명 ‘슈퍼 주총데이’에 주총을 개최하다 보니 정작 개인 투자자들의 주총 참석권이 제한되는 것이다. 실제 지난달까지 정기 주총 일정을 공시한 391개 코스피 상장사들을 분석한 결과, 39.39%(154개사)가 이달 18일에 주총을 개최할 예정이다. 한 IR 담당자는 “기업들끼리 주총날짜를 두고 담합하는 일은 없다”면서도 “겹치기 주총을 선호하는 이유 중 주총꾼 분산 목적이 있는 것은 사실”이라고 전했다.

주총꾼들이 오기 힘든 수도권이나 지방에서 주총을 개최하는 경우도 있다. 기업의 본사는 서울에 있지만, 지방에 지사가 있다면 지방에서 주총을 개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주총꾼들 뿐만 아니라 개인 투자자들의 접근성까지 떨어진다는 부작용이 발생할 수 밖에 없다. 이에 따라 개인 투자자들은 “기업들은 주주들이 주총에 참석하지 않기를 바란다”는 불만을 제기하기도 한다.

전문가들은 수십년째 반복되면서 점점 진화하는 후진적인 주총 문화를 개선하려면 기업과 정부가 함께 나서야 한다고 지적한다. 먼저 기업은 절대로 주총꾼에게 돈을 주지 않는다는 원칙을 강하게 세워야 한다. 대개 주총꾼은 소란을 피우면 돈을 준다고 알려진 기업의 주총을 지속적으로 찾기 때문이다. ‘돈을 주고 끝내자’는 생각보다는 주총꾼들의 의사 진행 방해로 인해 일정이 다소 지연되고 잡음이 흘러나오는 상황을 감수하고서라도 주총꾼에게 굴복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정부의 개입도 필요하다. 일본의 경우 과거 1980~1990년대에 우리나라의 주총꾼보다 훨씬 조직적인 형태의 총회꾼이 주총에 참석해 기업에 불리한 질문을 하는 방법으로 경영진을 협박하는 경우가 많았다. 또 기업이 총회꾼을 고용해 기타 주주들의 발언을 막는 일도 빈번하게 벌어졌다. 일본 정부는 이 같은 폐단을 막기 위해 여러 차례에 걸쳐 상법을 개정하고 선진 주총문화 도입을 유도해 총회꾼 퇴출에 성공했다. 우리 정부도 악의적으로 주총을 방해하는 이들에 대해서는 단호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게 업계의 주장이다. 예를 들어 기업이 주주에게 금품을 제공하는 것과 기업으로부터 금품을 받는 것을 금지하고 있는 상법 제634조의 2 ‘주주의 권리행사에 관한 이익공여의 죄’를 보다 강력하게 적용·집행하는 것이 대안이다. 상장사협의회 한 관계자는 “상법을 담당하는 법무부가 이익공여죄 집행에 사실상 손을 놓고 있어 주총꾼에 대한 단속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며 “법무부가 기업이 그동안 주총꾼에 금품을 제공했던 것을 탕감하는 조건을 건 뒤 이익공여죄에 대해 1~2년의 홍보와 계도기간을 거친 뒤 집중적으로 단속을 벌이면 주총꾼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법무부 측은 “주주총회를 악용해 이익을 챙기려는 주총꾼들의 폐해를 근절하기 위해 처벌을 강화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김연하기자 yeona@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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