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다란 스크린 위로 오래된 영화 필름이 돌아간다. 흑백의 영상 아래에서는 네 명의 성악가가 라이브 오케스트라 반주에 맞춰 노래를 부른다. 영상 속 배우의 입 모양과 절묘한 합을 이룬 음악. 이 둘이 하나가 되는 순간 천재 예술가 장 콕토의 흑백 영화 ‘미녀와 야수’(1946)는 그 어떤 색보다도 선명하고 다채로운 빛으로 반짝인다. 음악과 영상의 혁신적인 접목 작업을 펼쳐온 미국 출신의 세계적인 작곡가 필립 글래스가 대표작 ‘필름 오페라-미녀의 야수’로 한국을 찾았다. 필립 글래스는 할리우드 영화 트루먼쇼와 디 아워스, 일루셔니스트의 음악을 작곡한 인물로, 2013년에는 박찬욱 감독의 ‘스토커’에도 참여한 바 있다.
“장 콕토는 예술과 인간을 깊게 이해한 천재 예술가였어요. 그의 작품에 제가 받은 영감을 녹여내고 싶었습니다.” 필립 글래스(사진)는 22일 서울 역삼동 LG아트센터에서 열린 미녀와 야수 개막 기자간담회에 참석해 ‘필름 오페라’라는 새로운 시도의 배경을 밝혔다. 장 콕토(1889~1963)는 문학, 그림, 연극 등 다방면에서 활약한 프랑스의 영화감독이다. 프랑스 유학 시절 장 콕토의 작품을 접한 필립 글래스는 강렬한 메시지와 이미지에 매료돼 ‘미녀와 야수’, ‘오르페’, ‘앙팡 데리블’ 등 콕토의 대표작 세 편을 오페라로 만들었다. 이 중 하나인 1994년 초연작 미녀와 야수는 영화의 소리를 제거한 영상에 새로 작곡한 라이브 음악을 덧댄 색다른 형식으로 20년 넘게 큰 사랑을 받고 있다. 필립 글래스는 “콕토는 인간 내면의 본질적인 감정을 색다른 방식으로 표현한 예술가였다”며 “비록 콕토와 직접 만난 적은 한 번도 없지만, 나에게 그는 아주 중요한 협업자 중 한 사람”이라고 치켜세웠다.
명작을 ‘필름 오페라’로 구현하는 작업이 쉽지만은 않았다. 콕토의 미녀와 야수는 컴퓨터 그래픽이 발전하기 훨씬 이전에 만든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절묘한 카메라 연출과 섬세한 촬영으로 만들어 낸 환상적인 영상이 압권이다. 문제는 이 멋진 영상과 음악의 동조화였다. 따로 만든 음악을 라이브로 현장에서 영상과 맞추는 일은 하루 이틀 연습으로 극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영화 속 대사의 길이를 초 단위로 측정하고, 배우들의 입술 모양과 움직임에 맞춰 작곡한 음을 잘라붙였어요. 기술적으로 어려운 작업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첫 번째 테스트 공연에서 정교함이 많이 부족하다는 것을 느꼈죠. 음악감독인 마이클 리스만과 정말 여러 차례 수정작업을 해야 했어요.”
수많은 작품으로 인정받아 온 그이지만, 관객의 반응이 전달될 때면 늘 설레고 짜릿하다. “공연이 시작되고 몇 분 지나면 이 작품의 원리를 이해한 관객들의 탄성이 들려요. 실험적인 아이디어에 대한 반응은 매번 놀랍고 즐거운 것 같아요. 한국은 과연 어떨까요?” 궁금하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는 80세의 작곡가는 개구쟁이 소년처럼 해맑았다. 늘 새로운 방법을 연구하며 음악을 요리하는 필립 글래스. 그만의 호기심이 어디서 나오는지 알 것 같다. 3월 23~24일 서울 LG아트센터, 25~26일 통영국제음악당에서 공연한다.
/송주희기자 ssong@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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