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중공업은 최근 사무직과 생산직을 포함해 전체 직원의 10%가 넘는 3,000여명의 인원을 감축하고 100여개 부서를 통폐합하는 비상경영체제에 돌입한다. 최근 9분기 연속 적자가 이어지는 등 창사 이래 최대 위기 상황을 반영한 조치다. 하지만 25일 현대중공업 노조의 기자간담회에서는 이런 위기감은 찾아볼 수 없었다. 노조는 “부실 경영진도 함께 책임지라”며 “구조조정 중단 약속을 이행하라”고 회사를 강력 규탄했다. 앞서 현대중공업의 노조는 사측에 올해 임금 및 단체 협약 요구 사안을 통해 기본급 6.3% 인상, 실적과 상관없이 성과급 250% 고정 지급, 조합원 등의 현대호텔 평생 할인 및 무료이용권, 자연 감소 인원만큼 신입사원 충원 등을 요구한 바 있다.
국내에서 제조 공장을 운영 중인 전자업체는 최근 공장을 해외로 이전하는 방안을 심각하게 검토하고 있다. 높은 인건비와 생산일정을 발목 잡는 노조가 가장 큰 이유다. 회사 관계자는 “금속노조 소속으로 최근에는 노조의 힘이 많이 약해졌다고 하지만 여전히 회사 입장에서는 어려움이 있다”며 “많은 제조업체가 해외로 공장을 옮기는 것을 고려하는 것 역시 같은 이유”라고 말했다.
4·13 총선과 이후 거세게 불어닥치고 있는 구조조정을 보면서 가장 큰 한숨을 내쉰 곳은 경영계다. 총선 이후 달라진 정치 지형으로 정체 중인 노동개혁이 좌초되고 투자환경이 악화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 때문이다. 기업의 투자 확대와 경제의 일자리 창출력 강화, 임금·근로시간·고용형태 등 노동시장 핵심규율에 대한 불확실성 해소를 위해서는 노동개혁이 시급하고 야당의 협조가 절실하다. 하지만 여야가 입장 차를 좁히지 못하면서 사실상 19대 국회에서는 노동개혁 법안을 처리하기 힘들다는 인식이 강하다.
특히 구조조정 물결 속에서 대규모 감원이 이어지자 경영계는 차제에 노동의 유연성을 높이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외환위기 당시 노사가 손을 잡고 고통을 분담했듯이, 사측은 비용 절감과 대주주들이 사재를 털며 회사 경영을 살려내듯이 노조도 이기적 자세를 버리고 ‘보릿고개’를 넘는 데 동참해달라는 것이다.
지난 20일 서울 마포 가든호텔에서 진행된 이기권 고용노동부 장관과 외자 기업 최고경영자(CEO)들과의 만남에서도 이런 우려스러운 분위기가 이어졌다. 한 외국 경제단체 관계자는 “한국은 정보기술(IT)이나 인프라, 우수한 인력 등 모든 면에서 장점이 있고 고용이나 투자를 확대하고 싶지만 노동시장은 개혁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노동개혁법안 처리가 시급한 이유는 청년 일자리다. 통계청에 따르면 3월 청년 실업률은 11.8%로 1999년 6월 관련 통계 작성 이후 3월 기준으로는 가장 높았다. 고용부에 따르면 청년 취업애로 계층은 117만명에 달하고 있다. 특히 올해 정년 의무 60세 시행으로 향후 3~4년간 40만명의 취업 애로계층이 생기는 등 취업 시장에 소위 메가톤급 한파가 몰아칠 것으로 예상된다. 정부가 노동개혁법안 처리가 좌초될 경우 ‘플랜B’로 법 개정이 필요없는 일반해고 도입, 임금피크제 적용, 공공기관 성과연봉제 확산 등을 추진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노동계의 입장은 조금 다른 모습이다. 구조조정이 진행되는 기업 노조는 회사와의 강경 투쟁을 예고하고 있다. 평균 연봉 1억원에 육박하는 자동차 업체들 역시 분위기는 다르지 않다. 현대·기아차는 수입차 공세에 3월 내수점유율 64.8%로 역대 최저 수준의 내수점유율을 기록했지만 노조는 상황이 좀 다르다. 기아차 노조는 3주 이상 잔업·특근을 거부하며 “근무 강도 강화 없는 근로시간 단축”을 요구했고 관련 내용 잠정 합의안도 최근 부결시켰다. 현대차 등 다른 그룹 계열사 역시 19일 그룹사 공동교섭이 불발된 후 26일 양재동 본사를 항의 방문하는 등 초반부터 삐걱거리는 모습이다. 한국GM은 지난해 1조원에 가까운 적자에도 노조는 올해 400%의 성과급을 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경영계는 특히 야당이 국회 다수 석을 차지했고 대선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향후 노동계의 목소리가 정치 바람을 타고 더욱 커질 것을 우려하고 있다. 노조와의 갈등으로 한계 기업에 대한 정리를 위한 골든타임을 놓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것 역시 이 때문이다.
연구단체들은 우려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지난해 11월 자동차산업협회는 ‘호주 자동차 산업 파산의 원인과 시사점’ 보고서를 통해 “경직된 비정규직 고용, 사실상 불가능한 해고제도, 근로시간 탄력 운영의 어려움, 사업 내 전환배치, 기득권에 집착한 노조 등은 호주 자동차 산업의 모습과 유사하다”며 “호주는 그나마 제조업이 주력이 아니라 영향이 덜했지만 국내 경제에 미치는 타격은 매우 클 것”이라고 경고했다. 산업연구원 관계자는 “기업의 부담은 곧 노동자의 부담으로 이어질 수 있다”며 “노사가 머리를 맞대야 할 상황”이라고 분석했다. /강도원기자 theone@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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