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벌적 손해배상제는 기업 등이 의도적·악의적인 불법 행위로 손해를 입힐 경우 민법의 실제 손해배상 기준을 훨씬 넘는 금액을 피해자에게 배상하도록 하는 가중처벌 제도다. 야당의 도입 요구가 거세 여소야대인 20대 국회에서 통과 여부가 주목되고 있다. 제도 도입 찬성 측은 응징을 통해 가해 기업을 단죄하고 유사행위의 재발도 막는 데 효과적이라고 주장한다. 이에 반해 반대 측은 기업의 불법 재발 가능성을 억지할 수 있다는 명확한 데이터가 없을뿐더러 실손해배상을 원칙으로 하는 민사법 체계도 흔들 수 있다며 반발하고 있다. 양측의 견해를 싣는다.
징벌적 손해배상제도 얘기가 나오면 반기업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선량한’ 2위 업체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라. 업계 1위 기업이 위험한 제품을 몰래 팔아서 커다란 이익을 남기는 동안 2위 업체는 더 안전하게 제품을 만드느라 그렇게 할 수 없었다고 가정해보자. 징벌적 손해배상제는 사고의 위험을 알면서도 방치한 업체에만 적용되는 것이다. 그런 악의적인 업체가 1위 자리를 지켜왔다가 이제 진실이 밝혀졌다면 업계 순위를 바꿔주는 게 기업들 전체에 더 도움이 되는 일이다.
가습기 살균제 사망 사건의 가해 업체인 옥시의 경우처럼 제품의 위험을 알면서 이뤄진 고의적인 영업행태는 실제 발생한 손해만을 배상해서는 재발을 막기 어려울 때가 많다. 기업들은 제품의 위험을 알아도 사고가 났을 때 지불할 피해배상액수에 확률상 발생할 사고빈도 수를 곱해서 나오는 총액 수가 제품을 리콜하는 비용보다 적게 나오면 고의적 영업을 계속하게 될 동기를 갖기 때문이다.
바로 그 동기를 없애는 것이 징벌적 손해배상이다. 즉 실손해액과는 별도로 기업의 자산과 소득에 비례해 높게 배상액을 책정함으로써 ‘알면서 하는 악행’을 중단하도록 동기를 부여하는 것이다. 논리적으로도 악행으로 이익을 취하고 자산을 축적한 기업에 대해서는 그 수입과 자산에 따라 더 크게 배상하도록 해 다시는 악행을 하지 않도록 하는 것, 이 얼마나 아름다운 정의인가.
또 징벌적 손해배상제의 원조국인 미국에서도 실제로 징벌적 손해배상 때문에 기업이 망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징벌적 손해배상액수의 상당액은 어차피 보험사가 부담하게 될 뿐 아니라 실제로 액수를 산정할 때 배심원이 기업의 재정적 상황도 감안한다. 업계 순위가 바뀌는 것도 배상액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더 이상 위험한 제품을 팔지 못하므로 영업 규모가 줄어서 바뀌는 것이다.
제도 도입 반대론자가 주장하는 ‘법률 체계가 다르다’는 얘기는 하지 말자. 이미 징벌적 손해배상은 우리 안에 들어와 있다. 개인정보보호법 제39조, 신용정보보호법 제43조나 하도급거래 공정화법 제35조의 3배수 손해배상이 있다. 형사처벌과 함께 이뤄져 이중 처벌이라는 반론도 궤변이다. 법인에 대한 형사처벌의 실익이 무엇인가. 결국 경영진이 형사처벌 되더라도 법인에 동기부여를 하려면 별도의 제재가 필요하다. 법인은 돈으로 사죄한다. 반대론자들의 또 다른 주장인 ‘승소한 원고에게 돈이 몰리는’ 형평성의 문제는 한시적 기금 조성 등으로 충분히 해결 가능하다.
여기서는 도리어 왜 징벌손배에 배수제한을 두어서는 아니 되는지를 밝히겠다. 악의적 영업행태를 반복하지 않도록 동기부여를 하려면 실손해와 무관하게 가해자의 자산 및 소득에 충분히 타격이 될 정도로 높게 산정돼야 한다.
반대론자들이 과거 미국연방대법원이 10배 이상 징벌손배는 위헌이라고 판정했다고 말하는 것은 ‘심한 경우는 예외로 한다’는 단서를 빼놓으면 괴담 수준이 된다. 이 단서 때문에 1990년대 미국에서 아이라 고어씨가 BMW 차량을 구입한 후 차량을 인도 받기 전 생긴 흠집을 감추려고 BMW가 다시 페인팅한 사실을 알고 손해배상을 청구해 법원이 BMW에 200만달러의 배상금 지급을 판결한 후 미국의 평균 징벌손배액은 전혀 줄어들지 않고 있다. 미국의 25개 주에 징벌손배 배수제한이 있다는 주장도 맞지 않다. 뉴욕·캘리포니아·텍사스주와 같은 메이저 주들에 배수제한이 없고 또 메이저주인 일리노이주의 3배수 제한은 형사처벌 될 정도의 악성 영업에는 애초에 제한이 적용되지 않는다. 네브래스카 같은 곳을 빼면 옥시 사건과 같이 형사처벌이 확실시되는 사건에는 미국 전역에 배수제한이 없다고 보면 된다.
배수손배는 징벌손배의 대체재가 아니라 보완재다. 징벌손배의 엄격한 요건 즉 ‘고의나 중대한 과실’을 입증할 수 없더라도 이 사회가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가치를 보호하기 위해 특정 분야에 대해 실손해 이상의 손배를 물릴 경우다. 미국의 분야별 3배수 손배제도는 징벌적 손배 제한 차원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임금 체불, 담합, 독점 행위, 주택임대차 위반, 특허상표 침해, 환경훼손 등 사회적으로 가벌성이 높은 행위들에 대해 징벌손배를 받지 않더라도 작은 잘못도 ‘엄히’ 다루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박경신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