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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과 서구와의 탯줄-데지마





1634년6월23일 나가사키. 인부들이 바다를 메우기 시작했다. 목표는 미니 인공섬 건설. 포르투갈 상인들을 수용하기 위해서다. 일본에 조총을 전해 준 포르투갈은 막부 정권의 골치 거리였다. 기독교 금지령을 수차례 발동했음에도 선교에 나서는 경우가 잦았기 때문이다.* 나가사키를 근거지로 삼던 포르투갈인들은 통행에 아무런 통제도 받지 않았다.

‘출도’(出島·데지마)라는 이름을 얻은 인공섬의 면적은 3,969평. 바다를 메워 부채꼴 모양의 부지를 조성하고 숙소와 창고 13동을 건립하는데 은(銀) 300관**이 들었다. 1636년 완공된 데지마에 갇히게 된 포르투갈 상인들은 불만이었지만 더 큰 일이 터졌다. 시마바라에서 기독교도의 반란(1637년)이 일어난 것. 반란을 가까스로 진압한 막부 정권은 포르투갈을 데지마에서도 영구 추방해 버렸다.

막부 정권은 모든 외국인을 쫓아 내면서 단 하나 만큼은 남겨 놓기로 마음 먹었다. 종교 통제의 부담 없이 무역과 서양문물의 섭취라는 이익을 동시에 얻자는 계산에서다. 적극적인 포교활동을 펼치는 포르투갈이나 스페인은 일찌감치 배제되고 영국과 네덜란드만 남았다. 결국 낙점은 네덜란드가 받았다. 선교보다 오직 장사에만 관심 있다는 설득 논리가 먹혔다. 영국인들의 경우 장사에 치밀하지 못하고 자부심만 강하다는 이유로 배격됐다.

네덜란드 상인들도 처음에는 달갑지 않았다. 유럽식 건물을 포함, 주거용과 창고 50동이 넘는 대형 상관을 이미 히라도(平戶)에 유지해온 터. 상관을 데지마로 옮기라는 명령에 낙담했지만 권세가 하늘을 찌르는 막부 정권의 교통 정리에 찬밥 더운밥 가릴 형편이 아니었다. 결국 이 때부터 인공섬 데지마는 네덜란드와의 제한된 교역 장소로 225년을 명맥을 유지하며 근세 일본의 형성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입장에서는 짭짤한 장사였다. 누계 707척의 선박이 일본에 들러 대유럽 무역을 독점하며 막대한 이익을 쌓았다. 연간임대료 은 80관은 껌값과 다름없었다. 항상 수익이 많았으니까. 1715년에는 은 3,000관의 수익을 거뒀다. 막부는 연간 내항 선박 수를 조정해가며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들 다스렸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입장에서 본 데지마 상관의 비용과 이윤 추이. 이익이 비용보다 훨씬 컸다./출처 이종찬 지음 ‘난학의 세계사 147쪽


일본도 이익을 얻었다. 일본산 은이 네덜란드 무역선에 실려 중국과 간접 교역 결제 수단으로 쓰였다. 조선 도공의 후예가 만든 도자기 3만점이 한꺼번에 실려 나간 적도 있다. 막부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에서 수입한 후추 등을 조선에 에 재수출, 폭리를 취하기도 했다. 일본이 얻은 가장 큰 이익은 지식. 총과 대포 등 무기류는 물론 1만여권의 서양 서적이 난학(蘭學·서양학) 붐을 일으켰다.

나폴레옹 전쟁에서 네덜란드가 프랑스에 병합 당해 교역이 끊어졌을 때도, 막부 정권이 동인도회사에게 세금과 대여비 등을 면제해주고 심지어 식량까지 제공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 서양 문물의 수입 창구로서 역할을 일본 위정자들은 인정하고 있었다는 얘기다. 일본은 데지마에서 올라오는 ‘네덜란드 풍설서’를 통해 국제 정세도 소상하게 파악했다.



네덜란드 풍설서란 신임 상관장이 쇼군(일본 정치의 우두머리)을 알현할 때 바치는 국제 정보보. 일본은 이를 통해 미국의 페리 제독이 개항을 목적으로 언제쯤 올 것이라는 점도 알고 있었다. 18세기 난학(蘭學) 열풍이 불며 의학과 조선술 등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이탈리아의 경제사학자 카를로 치폴라의 ‘시계와 문명’에 따르면 일본인들은 17세기부터 유럽산 시계와 견줄 수 있는 근대식 시계를 만들어내고 독창적인 개량품까지 선보였다. 개항(1854년) 당시 네덜란드어를 구사하는 인력이 수백명 있었다. 데지마는 세계를 엿듣는 감청기지 겸 기술 교습소였던 셈이다.

자기 정체성을 지키면서도 송곳 만한 땅을 통해 세상을 파악하고 있었던 일본, 그리고 소중화 의식에 젖어 있던 조선. 데지마는 양국의 차이를 함축한다. 근대화의 속도 역시 여기서 갈렸다.

일본은 장기적으로 데지마를 복원할 계획이다. 1920년대에 나가사키항 확장 간척 공사로 매립돼 흔적도 없어졌으나 차츰 옛 건물들을 복원해나가고 있다. 데지마 건설 600주년을 맞는 오는 2030년대까지 데지마 내부의 건물 복원은 물론 둘레에 해자(垓子)를 파서 인공섬의 분위기를 살려낼 계획이다.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 에도 막부가 공식적으로 쇄국령을 내린 시기는 1633년. 조선과 중국을 제외한 모든 교역과 일본인의 해외 진출을 금지했다. 1634년과 1639년에는 보다 강력한 쇄국령을 내렸다. 공식적인 쇄국령 발표 이전에도 막부는 지방영주(다이묘)들의 대형 선박 보유 금지(1609), 외국 무역선 입항지 제한(1616), 영국의 히라도 상관 폐쇄(영업 부진이 명분이었다·1623), 스페인 선박의 일본 내항 금지(1634) 등 쇄국을 자물쇠를 하나 하나 채워나갔다. 막부가 쇄국과 기독교 탄압에 나선 이유는 일본 불교처럼 종교가 정치세력화하는 경우를 꺼렸기 때문이다. 데지마 설치 당시 일본에는 약 37만명, 당시 2,500만 인구의 약 1.5%를 차지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보다 결정적으로 시미바라에서 일어난 기독교도들의 반란이 쇄국의 빗장을 더욱 단단하게 걸게 만들었다.

** 일본은 세계적인 은 생산국으로 17세기 서구세계에 알려져 있었다. 실제로도 고품위 은광산이 많았다.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에 한국은 나오지 않지만 일본과 관련해서는 은과 구리에 대한 얘기를 비롯해 모두 4차례나 언급된다. 데지마 건설의 비용은 포르투갈과 교역을 통해 이익을 보던 상인 25명이 막부의 명령에 따라 공동 부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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