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슈바이처’로 잘 알려진 장기려 박사가 부산 복음병원에서 일할 때의 일화다. 하루는 병원문을 나서는데 늙은 거지가 구걸을 했다. 옷 구석구석을 한참 뒤적거리다 양복 속 주머니에서 월급으로 받은 수표를 발견한 장 박사는 수표를 거지의 손에 쥐어 주며 이렇게 말했다. “이것은 수표라는 것인데 은행에 가면 돈으로 바꿔줄 겁니다.”
지난 2000년대 초까지만 해도 우리 샐러리맨들은 장 박사처럼 수표로 월급이나 수당을 받는 일이 흔했다. 일부 간 큰 남편들은 수표 한두 장을 빼내 술 한잔하는 데 썼다가 부부 싸움을 했다는 얘기가 심심찮게 들리곤 했다. 결혼 시즌에는 신혼부부나 그 부모들이 축의금 수표를 현금으로 바꾸기 위해 은행에 몰리기도 했다. 수표 발행처가 다양해 현금화에 시간이 한참 걸리는 게 예사였다. 주거래 은행이 있더라도 다른 은행 수표를 현금화하는 데 최소 2~3일이나 걸린 탓이다.
이 같은 불편함에도 수표는 ‘폼’잡는 데는 제격이었지 싶다. 수표로 두둑한 지갑이 특히 그랬다. 그런 친구를 보면 왠지 부럽기도 했다. 이렇게 현금만큼 쉽게 볼 수 있던 수표가 사라지고 있다. 5만원권이 나온데다 정보기술(IT)의 발달로 빠르고 안전한 첨단 금융거래 기법이 크게 늘어났기 때문이다. 2015년 정액(10만·100만원권) 자기앞수표의 결제규모는 하루 평균 2,670억원으로 전년에 비해 15%나 줄었다. 특히 10만원권은 22.3% 급감했다고 한다.
이는 우리나라만의 현상이 아니다. 유럽의 경우 빠르게 수표가 종적을 감추고 있다. 덴마크에서는 아예 올해부터 신규 수표발행을 중단하기로 했다는 외신 보도다. 현재 유통 중인 수표는 발행은행에서만 현금으로 바꿔준다고 한다. 지난해 덴마크에서 발행된 약 60만장의 수표 대부분이 기업 간 거래였을 정도로 일반인들은 거의 수표를 쓰지 않고 있다. 아직 미국에서는 수표 유통이 활발하지만 기술 진보와 함께 수표의 종말이 다가오고 있다./임석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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