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메뉴

검색
팝업창 닫기
이메일보내기

FORTUNE FOCUS|부동산업계의 거인

MAN OF PROPERTIES

이 기사는 포춘코리아 2017년 4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부동산, 출판업, 자선활동, 그리고 역경 속의 낙관적 태도는 프랜시스 그린버거가 영위해 온 멋진 삶의 핵심이다.


그린버거는 “역경은 우리에게 다른 이들과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을 제공한다”고 말했다.





프랜시스 그린버거 Francis Greenburger는 절대 어려운 일을 회피하지 않는다. 그는 12세 때 이미 아버지가 운영하는 뉴욕의 저작권 대리점 샌퍼드 그린버거 어소시에이츠 Sanford J. Greenburger Associates에서 장부 기록하는 일을 했다. 10대부터 사업가 기질을 보인 그는 고등학교 중퇴 후 자기 자본을 한 푼도 들이지 않고 부동산 거래를 하기도 했다. 그는 낡은 부동산을 매입하고 수리해 수백만 달러의 수익을 올렸고, 개인적 역경을 극복하고 재기하기도 했다. 현재 67세가 된 프랜시스 그린버거는 총 자산규모가 약 40억 달러인 부동산 개발 및 투자 회사를 소유하고 있다. 이 회사의 2016년 매출은 3억 3,600만 달러 였다. 그가 아직 관여하고 있는 샌퍼드 그린버거 어소시에이츠는 댄 브라운 Dan Brown 같은 유명 작가들의 저작권을 관리하고 있다. 그의 이야기를 더 자세히 들어보자.

매우 어렸을 때, 나는 아버지 회사에서 종종 시간을 보내곤 했다. 당시 아버지는 작가들과 글로벌 출판사들을 대리해 문학작품의 저작권을 관리하는 2인 에이전시를 운영하고 있었다. 그는 당시 12세에 불과했던 내게 간단한 장부기록 일을 시켰고, 나는 그 일을 꽤 잘 해냈다. 아버지는 내가 자신의 사업을 물려받길 원했다.

우리 가족은 경제적으로 풍요롭지 않았다. 나는 일주일에 용돈 5센트를 받았다. 겨우 콜라 한 캔을 살 수 있는 돈이었다. 나는 돈이 더 많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신문 배달, 눈 치우기 등 온갖 일을 맡아서 했고, 그런 생활에 점차 익숙해졌다.

14세 때 나는 독일 출판사 베르텔스만 Bertelsmann을 대리하는 일을 맡았다. 미국 책의 저작권을 사서 독일에서 유통하는 일이었다. 아버지는 기존에 대리한 독일 출판사와의 마찰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베르텔스만 일을 내게 맡겼다. 그는 그 때 내가 14세라는 사실을 밝히지 않았다. 당시 나는 18세 청년 정도로 보였기 때문에 사람들도 그렇게 믿었을 것이다. 책이 가벼운 페이퍼백으로 출판되기 시작하면 두껍고 비싼 하드커버를 사려는 사람이 없어지기 때문에 나는 하드 커버를 50센트에 저렴하게 사서 1달러 25센트에 되팔았다. 열네 살짜리 아이가 6만 달러 정도의 연 소득을올렸다.

도서 사업을 위한 사무실을 임차할 때, 나는 필요한 면적보다 더 넓은 공간을 임차해 반은 다시 임대를 주었다. 재임대 수입으로 사용한 공간의 임차료를 지불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사무실을 사용할 수 있었다. 그때 나는 부동산에 직관적인 끌림을 느꼈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약 5,000달러를 빌려 타임 에퀴티 Time Equities라는 회사를 설립했다. 나는 사업에 완전히 몰두해 있었기 때문에 16세 때 학교를 그만두기로 결심했다. 야간 학교를 다니며 공부를 마쳤고, 이후 바루크 칼리지 Baruch College로 진학을 할 수 있었다.

아버지 친구분 중에는 임대가 안 되는 건물 때문에 속앓이를 하는 부동산 중개인이 있었다. 나는 그 건물을 매입할 만큼 자금적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우선 임대차 계약을 맺었다. 임대료로 1달러만 지불하는 대신, 내가 건물을 재임대해서 받는 금액을 나누는 조건이었다.

그러다 1970년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나는 부동산 사업에 좀 더 집중하기로 했다. 대부분의 경우, 책을 출판사에 팔았을 때 생기는 수익은 수천 달러 정도였다. 하지만 부동산을 팔면 수백만 달러를 남길 수 있었다. 나는 아버지가 운영하던 저작권 에이전시의 매니저 직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내 고객들을 다른 에이전시로 넘겨주었다.

나는 친지들로부터 투자를 받아 매우 낡은 건물들을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낮은 가격에 매입하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은행 대출을 받기도 했다. 1970년대에만 아파트 20채를 매입해 수리한 후 임대료를 올려 받았다.

당시 가장 큰 어려움은 자금 문제였다. 나에겐 자본이 거의 없었다. 1975년 당시 소호 SoHo *역주: 뉴욕 맨해튼의 남쪽, 휴스턴가(街)와 커널가(街) 사이의 지역 는 공장 및 창고 지대였다. 그러나 그 후 예술가들이 점차 몰려들기 시작했다. 나는 이 곳에 변화가 일어날 것이라 예상했다. 마침 한 단지에서 건물 2채가 매물로 나왔고, 나는 변호사에게 7만 5,000달러를 제시했다. 그러나 어떻게 매입 대금을 마련할지 막막한 상황이었다. 우선 나는 변호사를 통해 2순위 담보대출로 2만 달러를 변통했다. 그리고 한 은행가로부터 나머지 5만 5,000달러를 빌렸다. 나는 그렇게 아무 것도 없이 부동산을 구입했다. 현재까지 소유하고 있는 이 건물들의 가치는 750만 달러에 이르고 있다.

나는 매우 검소한 생활을 했다. 1975년 당시 26세였던 나는 창문도 없는 로프트 loft *역주: 공장 등을 개조한 아파트에서 여자친구와 함께 살았다. 어느 날 밤, 어깨 위로 올라온 생쥐 때문에 잠에서 깨기도 했다. 그래서 바로 다음 날, 내 소유의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1970년대 후반, 나는 개인 투자보다 서너 배는 수익이 더 높은 협동조합으로 사업영역을 옮겼다. 우리는 이후 7년 동안 뉴욕에서 100채의 건물과 약 1만 채의 아파트를 협동조합으로 바꾸는 작업을 했다.

그러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상황을 돌아볼 여유를 갖게 되었다. 내가 가진 부동산이 모두 뉴욕에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다른 투자자들이 간과하거나, 가능성을 찾지 못한 시장을 찾아 나섰다. 1985년 무렵부턴 시외에 위치한 부동산을 매입하기 시작했다. 2년 후 부동산 세법이 바뀌었고, 곧 블랙 먼데이 Black Monday로 주가가 폭락했다. 미국 경제는 급작스러운 침체 상태에 빠졌고, 그 결과 지역 저축은행(Savings & Loan) 도산이 이어졌다.

우리에겐 매우 암울한 시기였다. 담보대출 조건이 까다로워지면서 부동산을 쉽게 팔 수 없었다. 그만큼 대출금 상환에 어려움을 겪었다. 부동산 가격이 하락하는 바람에 나는 소유한 부동산 가치보다 더 큰 빚을 지게 되었다. 결국 그 중 일부를 팔아 빚을 갚고 가까스로 살아 남을 수 있었다.

그러던 1990년 장남 알렉산더 Alexander가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그 후 일년 동안은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다. 내 앞에는 두 가지 선택지가 놓여있었다. 아들을 따라 삶을 마무리하느냐, 아니면 계속 살아가느냐의 양 갈래 길에서 나는 결국 후자를 선택했다.

역경은 우리에게 다른 이들과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을 선사한다. 차남 모건 Morgan은 세 살 때부터 정신질환을 앓았다. 2012년 그는 택시기사의 돈 20달러를 훔친 죄로 체포되었다. 아이가 재판에 회부되자, 나는 정신질환 환자들이 어떤 사법판결을 받게 되는지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투옥만이 답은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그린버거 사회 및 형사 정의센터(Greenburger Center for Social and Criminal Justice)를 설립하고, 사회운동을 시작했다.

내 삶의 원동력 중 하나는 바로 낙관적인 태도다. 대개 상황은 시장 지표가 암시하는 것만큼 나쁘지 않은 경우가 많다. 1990년 통독 이후 베를린은 경기 침체를 겪었다. 그 곳 부동산 가격이 하락하는 것을 지켜본 우리는 베를린의 건물을 매입했다. 현재 베를린은 유럽에서 사람들이 가장 선호하는 거주 지역이다. 지금 우리는 네덜란드 부동산을 대규모로 매입하고 있다. 나는 2008년 글로벌 경기침체가 올 것이라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커다란 두려움을 느꼈지만, 오직 최선을 다했을 뿐이었다. 구조조정 대신 임금을 삭감하는 등 뼈를 깎는 희생을 감수했다.

성공한 사업가라면 반드시 자선활동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성공의 과실을 공유하는 최선의 방법은 바로 사회 환원이다. 아버지는 돈에 대해 걱정이 많았던 분이었다. 내가 지금까지 한 일들을 안다면 그는 매우 놀라면서 자랑스럽게 여길 것이다.



내 최고의 조언 프랜시스 그린버거 Francis Greenburger CEO, 타임 에퀴티 Time Equities

독자적인 사고를 하라.
전세계 많은 사람들은 뉴욕이 ‘투자의 천국’이라 생각한다. 사실이다. 그러나 가격이 그렇게 높지 않을 때의 이야기다. 나는 뉴욕 부동산의 현재 가격이 지역에 따라 너무 편차가 크다고 생각한다.

문제의 당사자를 찾아가라.
임대료를 낼 처지가 못되면, 당신은 가족이나 은행을 찾아가 돈을 빌릴 생각을 할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를 진짜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은 건물주다. 임대료 지불 날짜가 돌아오기 전에 그와 충분히 대화를 해서 해결 방법을 모색하라.

체계적인 아침형 인간이 되라.
나는 하루를 새벽 4시에 시작한다. 회의가 열리는 아침 9시까지 이메일을 읽고 답장을 보낸다. 매우 체계적인 성격을 가진 나는 두 명의 비서와 1명의 비서실장으로부터 제대로 된 보좌도 받고 있다. 나는 외부에서 일할 때에도 업무에 소홀함이 없다. 여행 중에도 항상 최신 정보를 챙긴다.




서울경제 포춘코리아 편집부 / INTERVIEW BY DINAH ENG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주소 :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6 트윈트리타워 B동 14~16층 대표전화 : 02) 724-8600
상호 : 서울경제신문사업자번호 : 208-81-10310대표자 : 손동영등록번호 : 서울 가 00224등록일자 : 1988.05.13
인터넷신문 등록번호 : 서울 아04065 등록일자 : 2016.04.26발행일자 : 2016.04.01발행 ·편집인 : 손동영청소년보호책임자 : 신한수
서울경제의 모든 콘텐트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복사·배포 등은 법적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Copyright ⓒ Sedaily, All right reserved

서울경제를 팔로우하세요!

서울경제신문

텔레그램 뉴스채널

서울경제 1q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