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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인의 예(藝)-<15>탄은 이정(下) '풍죽'] 거센 바람에 홀로선 대나무, 당당한 君子의 기개가...

농묵으로 강인하게 표현한 대나무

희미하게 그린 뒤쪽 세그루와 대조

세찬 바람과 혼연일체...춤 추는 듯

조선 고유의 묵죽 양식 창안한 이정

30대에 "中 문동·소식급" 평가받아

탄은 이정 ‘풍죽’ 비단에 수묵, 127.5X71.5cm. 간송미술관 소장 /사진제공=간송미술문화재단




의지할 데 없는 대나무가 세찬 바람을 앞에 홀로 맞서고 있다. 뒤에 선 대나무는 휘청이는 몸을 가까스로 뿌리에 의지했다. 파다닥거리는 댓잎에서 바람의 기세가 느껴진다. 뒤로 젖힌 이파리는 찢어질 듯 위태롭다. 애초 자리 잡고 뿌리 내린 곳이 거친 바위틈이었으니 누굴 탓하겠는가, 이것이 대의 숙명인 것을.

한국 회화사를 통틀어 최고의 묵죽(墨竹) 화가로 평가받는 이정(李霆·1554~1626)의 대나무 중에서도 단연 으뜸으로 손꼽히는 ‘풍죽(風竹)’이다. 그림 속 대나무는 총 네 그루다. 담묵(淡墨)으로 희미하게 그려 이리저리 흔들리는 뒤의 세 그루와 달리 앞에 선 농묵(濃墨)의 대나무는 굳세고 강인하다. 댓잎 한 획 한 획이 올곧다. 꺾이고 부러질지언정 굽히고 휘둘리지 않겠다는 의지가 결연하다. 나부끼는 대나무는 이미 바람과 혼연일체라, 어느새 고된 몸부림이 춤을 추는 듯하다.

간송미술관 소장품인 이 그림을 실제로 볼 기회는 흔치 않으나 그 이미지는 지갑 속에서 찾을 수 있다. 5만 원권 지폐 뒷면이다. 그러나 세로로 길죽하게 세웠어야 할 그림을 가로로 눕히고, 원작의 구도를 무시한 채 옹색하게 욱여넣고 중간쯤에서 나무를 잘라버렸다. 설상가상으로 어몽룡(1566년~생몰년 미상)이 그린 ‘월매도’를 앞에 두고 이정의 ‘풍죽’은 희뿌옇게 뒷배경으로 깔아둔 탓에 원작의 등등한 기세는 찾아보기 어렵다. 다분히 불만스럽다. 돈이 내미는 유혹의 손길 앞에 “대나무인 나도 이렇게 버티는데 사람인 너도 굴하지 마라” 독려한다 셈 치자니 그나마 낫다.

이정의 작품이 중요한 이유는 단지 대나무를 ‘잘’ 그렸다는 사실 뿐 아니라 우리식 미감을 반영한 조선 시대 고유의 묵죽 양식을 창안했다는 점에 있다. 일찍이 대나무 그림은 중국 북송 때의 문인화가 문동(1018~1079)과 소식(소동파·1037~1101)이 평정했다. 고려 때부터 우리나라에서도 대나무 그림이 즐겨 그려지기 시작했는데 그 평가와 찬사의 기준은 한결같이 ‘문동과 소식’이었다. 30대에 이미 ‘문동과 소식’을 떠올리게 하는 묵죽화라 호평받았던 이정에 대해 백인산 간송미술관 연구실장은 “조선 중기 탄은 이정의 등장 이후 대나무 그림을 두고 ‘탄은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하다’ ‘탄은이 살아 온듯하다’ 는 식으로 상찬하는 글이 나오기 시작해 조선 묵죽의 기준 작가가 마련됐다”면서 “학술적 연구가 가능한 조선 초기 이전의 대나무 그림이 거의 남아있지 않아 한계가 있지만 이정을 기점으로 예전에 없던 조형성과 양식적 특성이 나타나기 시작했기에 ‘조선 묵죽화의 정립자’라 부를 만하다”고 분석했다.

문인화의 소재로 매·난·국·죽이 다뤄졌지만 그중 ‘군자’의 상징성을 맨 먼저 얻은 것은 대나무였고 매화가 그 뒤를 이었다. 난과 국화가 등장한 것은 18세기 이후의 일이다. 그런 탓에 조선 시대에는 유독 대나무 그림을 높이 평가했다. 백 연구실장은 “도화서 화원 선발 시험 과목이 산수·인물·화조 등이었는데 그중 가중치 제일 높았던 분야가 ‘묵죽’이었다는 사실은 ‘경국대전’에 기록으로 전한다”고 설명했다. 대나무 그림은 조선이 법으로 정한 최고의 그림이었다는 얘기다.



탄은 이정 ‘문월도(問月圖)’ 종이에 그린 수묵담채화, 24.0×16.0cm, 간송미술관 소장 /사진제공=간송미술문화재단


이정은 세종대왕 넷째 아들의 증손인 왕실 사람이다. 조선 시대에 활동한 ‘이정’이란 이름의 왕실 종친 서화가만 다섯 명 이상이라 헷갈릴 수 있으니 ‘탄은(灘隱)’이라는 호로 구별해야 한다. 이정은 임진왜란 때 왜적의 칼에 맞아 오른팔을 다친 후 치료 겸 정치적 이유로 지금의 충남 공주시 탄천 부근에 월선정을 짓고 숨어 지냈다. ‘탄은’이라는 호는 탄천에서 은거한 그의 삶을 압축한다.

이정이 서울을 등지고 공주 탄천에서 살았던 건 대쪽같은 그 성품 탓이다. 어차피 왕실 종친이라 정계 진출은 불가능했고 직접 정치에 나서고자 했던 적도 없으나 광해군을 향한 입바른 소리를 참지 못했다. 인목대비 폐위를 만류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으니, 결국 눈밖에 나고 말았다. 반면 탄은은 인조에 대해서는 극진했다. 인조 즉위 이듬해인 1624년 ‘이괄의 난’이 일어나 왕이 공주로 피신했을 당시 이정이 곡식을 대주었다는 일화는 인조가 적은 탄은의 추도사에도 등장한다. 가까운 왕족에게 주어지는 작호에 따라 정3품 정(正) 등급의 ‘석양정’에 봉해진 이정이 훗날 종1품의 ‘석양군’까지 승격된 것도 인조와의 각별함이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탄은이 살았던 월선정은 “두 그루의 소나무와 천 그루의 대나무가 빽빽한” 곳으로 전한다. 풍죽뿐 아니라 새로 나는 순죽(筍竹), 빗속 우죽(雨竹), 눈 맞은 설죽(雪竹), 이슬 얹은 노죽(露竹) 등 변화무쌍한 대나무의 표정을 생생하게 그릴 수 있었던 까닭이 대밭에 둘러싸여 가까이 보고 살았기 때문일 것이다. 달이 먼저 오는 정자라는 뜻의 월선정(月先亭)에 은거하던 이정 자신을 그린 것으로 보이는 그림 한 폭이 전한다. 간송미술관 소장의 ‘문월도(問月圖)’는 탄은의 작품으로는 극히 드문 인물화다. 듬직한 바위에 걸터앉은 도인이 해맑은 표정으로 달을 가리킨다. 벗겨진 더벅머리와 맨발이 정겹다. 달과의 문답에서 해탈을 깨친 희열이 온 얼굴에 만연하다. 푸른빛 도포 자락과 옷깃에서 댓잎의 고고한 기운이 느껴진다. 거친 바람 견디고 얻은 미소가 달보다 더 빛난다.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

탄은 이정 ‘묵죽도’, 149.4x69.9cm /사진제공=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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