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1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 이후 고공행진을 벌여온 달러화 가치가 미국의 정치 불안정 지속으로 1년여 만에 최저치로 추락했다. 당분간 달러 약세가 지속될 것이라는 전망이 힘을 얻으면서 국제금융시장에서는 환차익과 투자수익을 동시에 기대할 수 있는 ‘캐리 트레이드’ 열풍이 확산되고 있다.
21일(현지시간) 뉴욕외환시장에서 유로·엔·파운드 등 6개 주요통화 대비 달러가치를 나타내는 달러인덱스는 93.67로 마감해 지난해 6월 이후 가장 낮은 수준을 나타냈다. 달러인덱스는 ‘트럼프 효과’로 지난해 12월20일 103.28로 최고점을 찍은 후 올 초까지 강세를 이어갔지만 4월 이후 약세가 계속되며 연간 기준으로 10% 가까이 추락한 상태다.
달러 약세로 한때 1,200원선을 뚫었던 원·달러 환율도 21일 1,118원20전을 기록했으며 유로화는 26개월 만에 유로당 1.16달러를 돌파하는 등 눈에 띄는 강세를 보이고 있다. 외환시장에서는 유로가 1.17달러를 뚫는 것을 시간문제로 간주하며 1.18달러까지 넘볼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오기 시작했다.
달러 약세가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보이자 금리가 낮은 달러화로 자금을 조달해 상대적으로 금리가 높은 신흥국 등에 투자하며 환차익과 투자수익을 함께 노리는 캐리 트레이드 가 확산되고 있다. 캐리 트레이드는 과거 일본에서 저금리에 실망한 투자자들이 엔저가 지속되자 해외투자에 나서면서 주목됐던 투자방식이다.
국제금융센터에 따르면 2·4분기 캐리 트레이드의 매력이 부각되면서 한국과 중국·인도·태국·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 등 아시아 6개국에 몰린 외국인 채권 자금은 321억7,000만달러로 1·4분기(97억달러)보다 331%나 급증했다. 씨티그룹도 최근 투자보고서에서 “낮은 변동성과 달러 약세로 위험자산 선호 심리가 커지는 상황은 캐리 트레이드에 최적의 환경”이라며 “캐리 수익률이 여전히 최고”라고 평가했다고 파이낸셜타임스(FT)는 전했다.
캐리 트레이드는 미국의 정치불안 외에 물가지표 부진으로 미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금리 인상 속도조절론에 힘이 실리는 반면 유럽중앙은행(ECB)은 본격적인 긴축 신호를 보내며 달러 약세가 여름 내내 지속될 가능성이 불쏘시개 역할을 하고 있다. 20일 마리오 드라기 ECB 총재는 가을쯤 양적완화 축소를 논의할 수 있다고 밝혀 유로화 가치 상승에 호재가 됐다. 이에 비해 미국에서는 지난해 대선 때 트럼프 선거캠프와 러시아 간 내통 의혹을 둘러싼 ‘러시아 커넥션’이 확대되고 건강보험 재입법이 무산된 데 이어 인프라 투자 확대와 감세 등 트럼프노믹스도 동력을 찾지 못하는 상태다. CNBC는 “달러화가 미국의 정치적 바리케이드에 막혀 있다”고 지적했다.
캐나다·호주 등이 긴축 행보에 속도를 내는 것도 달러 약세에 기반을 둔 캐리 트레이드를 부추기고 있다. 12일 캐나다는 7년 만에 금리를 인상해 미 달러화에 대한 캐나다달러 가치를 14개월 만에 가장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호주 중앙은행(RBA)도 최근 통화정책회의에서 금리 목표가 현재보다 2%포인트 높은 3.5%라고 명시해 호주달러 가치가 최근 2주간 4%가량 오르는 등 2015년 5월 이후 최고 수준을 나타냈다. 미 경제가 개선되고 있지만 임금 등 물가 상승이 완만할 것으로 보이고 내년 2월 임기를 마치는 재닛 옐런 연준 의장이 통화정책을 안정적으로 이끌며 달러의 변동성도 당분간 크지 않을 것으로 예상되는 점 등도 추가 달러 약세에 힘을 싣고 있다.
하지만 무차별적 캐리 트레이드에는 신중해야 한다는 지적도 상당하다. 이와 관련해 골드만삭스는 브라질 헤알화나 러시아 루블, 인도 루피 등은 달러 대비 추가 강세를 보이기가 쉽지 않을 것으로 내다보면서 멕시코와 터키·남아프리카공화국 등의 캐리 트레이드 매력은 살아 있다고 전망했다. /뉴욕=손철특파원 runiron@sedaily.o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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