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정부가 ‘큰 정부’를 표방하면서 예산지출이 크게 늘고 내년에 국가채무도 700조원을 돌파할 것이 확실해졌다. 나랏돈을 좀 더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하지만 ‘재정건전화법’은 국회와 정부의 무관심 속에 장기 표류하고 있는 실정이다.
21일 재정 당국 등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나랏돈 지출이나 국가채무를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제도가 없다. 한 해 굴리는 예산이 400조원이 넘는 국가 수준에 걸맞지 않게 재정관리체계는 후진적이라는 지적이 끊이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해외 국가들과 비교하면 우리의 후진성은 더 도드라진다. 한국재정정보원의 자료를 보면 ‘재정준칙’을 운영 중인 나라는 85곳(2014년 기준)에 이른다. 재정준칙은 재정을 건전성 있게 유지하기 위한 법적 장치다. 85곳 가운데 선진국이 29곳이고 개발도상국과 저소득 국가도 각각 33곳, 23곳이나 됐다.
이런 상황을 바로잡기 위해 기획재정부는 지난해 재정준칙을 포함한 재정건전화법을 국회에 제출했다. 국가채무는 국내총생산(GDP) 대비 45% 이내로 유지하고 국가재정수지도 GDP의 3% 이하로 관리할 것을 명시하고 있다.
당시 야당이었던 더불어민주당도 지난해 12월 같은 취지로 재정건전화법을 발의했다. 대표발의한 송영길 민주당 의원을 포함해 무려 39명의 국회의원이 법 발의에 참여했다. 민주당의 안은 정부안보다도 훨씬 강력했다. 신규 국가채무를 GDP 대비 0.35% 이하로 제한한다는 내용이 대표적이다. 정부안대로라면 올해 약 130조원의 나랏빚을 늘릴 수 있는 여지가 있지만 민주당 안대로면 6조원 정도밖에 못 늘린다. 올해 국가채무는 40조~50조원 정도 늘어날 것으로 전망되는데 민주당 법안이 통과되면 채무 증가를 상당 부분 억제할 수 있다.
하지만 재정건전화법은 발의 이후 제대로 논의되지 못한 채 국회에서 잠자고 있다. 새 정부 들어서는 재정건전화법은 더 찬밥 신세다. 정부의 한 관계자는 “나랏돈을 아껴 쓰자는 취지의 재정건전화법을 얘기하면 문재인 정부의 재정지출 확대 기조에 태클을 거는 모양새가 되기 때문에 다들 말을 쉽게 꺼내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여당 관계자 역시 “9월 정기국회 때는 한 번 논의해봐야지 않겠느냐”면서도 “민생 경제 살리기가 제일 중요한 시점이라 재정건전화법이 아주 시급한 것은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런 태도는 직무유기나 다름없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국책연구기관의 한 관계자는 “재정지출 확대가 기정사실화된 지금이야말로 나랏돈을 체계 있게 쓰기 위한 법적 장치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며 “국회와 정부가 이런 사실을 알면서도 외면하고 있어 걱정이 크다”고 지적했다.
/세종=서민준기자 morandol@sedaily.com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