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5년 2월 산업통상자원부는 한중 자유무역협정(FTA) 가서명 후 브리핑을 열고 “(한중 FTA 체결로) 동아시아 경제공동체 구축과 한반도 평화 안보에 기여했다”고 자축했다. 하지만 협정이 발효(2015년 12월)된 지 1년도 안 된 지난해 7월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사드) 갈등이 본격화됐고 중국 시장에서 활동하는 우리 수출·투자기업과 협력사들은 중국 정부의 무역보복에 융단폭격을 당하고 있다. 협정 체결 당시 우리 기업이 중국에서 차별받지 않을 권리를 보장한 한중 FTA를 두고 정부는 “수출과 투자 기업의 손톱 밑 가시를 제거했다”고 공언했다. 지금 현장에서는 약속된 투자자 보장은 온데간데없고 사드 보복에 기업들의 손톱 밑은 가시보다 더한 대못이 박히는 일만 벌어지고 있다.
실제로 한중 FTA에 규정된 의무를 정면으로 위반하는 중국을 넋 놓고 볼 수밖에 없는 게 국내 기업의 현실이다. 소방과 안전규정 등을 문제 삼아 거의 모든 매장이 영업정지돼 천문학적인 손실을 보고 있는 롯데마트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한중 FTA 투자챕터(12장)는 외국인투자가가 중국 업체(내국민대우)나 제3국 투자자(최혜국대우)보다 불리한 대우를 못 받게 돼 있다. 롯데마트의 영업정지가 정당하려면 현지 대형 유통업체나 까르푸 등 제3국 유통업체도 같은 규정을 적용받아야 한다. 중국 정부가 롯데마트의 발전기와 변압기를 몰수한 조치도 부속서(12)의 수용 조항을 위배해 외국인투자가의 재산권을 침해한 강압적 조치다.
현대차 합작법인인 베이징현대가 납품대금 지연을 해결하기 위해 국내에서 자금을 수혈하는 조치를 막는 것도 협정에 위배된다. 한중 FTA는 출연금 등에 대해 지체 없이 송금을 허용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성범 변호사(법무법인 화우)는 “베이징현대의 경우 국영기업인 베이징기차가 소유하고 있어 사실상 정부로 볼 수 있다”며 “롯데마트도 한 꺼풀만 벗기면 FTA 협정을 위반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뿐만 아니라 중국정부가 LG화학과 삼성SDI의 배터리를 탑재한 전기차를 보조금 지급 대상에서 제외한 조치도 내국인대우와 최혜국대우 위반 사항이다. 모두 투자자국가소송(ISD) 제소감이다. 금한령을 내려 한국 관광과 상용비자 발급을 제한한 것도 경제협력(17장)과 자연인의 이동(11장)을 위배할 소지가 크다.
현지 진출업체들이 생사의 기로에 섰지만 우리 정부는 중국에 저자세로 일관하고 있다. 양국은 한중 FTA에서 장관급 공동위원회와 산하 13개 분야별 위원회를 만들고 협정상의 약속을 잘 이행하는지 감시하는 의무를 뒀다. 하지만 우리 정부는 사드 보복이 지속되던 올해 1월 한중 공동위원회를 장관급이 아닌 국장급으로 열고 “한중 FTA가 양국 간 교역과 투자, 협력의 주춧돌이 되고 있으며 모두에 득이 되고 있다”는 한가한 평가를 내놨다. 정확히 두 달 후 중국은 롯데마트 중국 매장 112곳 가운데 87곳을 영업정지시켰고 현대차는 불매운동과 현지 합작사와 협력사의 치졸한 행태에 공장이 멈춰 섰고 판매량은 반토막 났다. 공동위에서 보인 저자세 산업 외교가 되레 기름만 부은 셈이다.
정부가 꽁무니를 빼면 우리 기업에 남는 것은 FTA 협정에 규정된 ISD다. ISD는 국제관계상 미국 등 철저히 강대국의 기업만 승산이 있다. 송백훈 성신여대 경제학과 교수는 “현대차나 롯데마트가 중국정부를 상대로 국제소송을 제기하는 것은 자살행위에 가깝다”고 말했다. 최원목 이화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도 “현지 조사가 어려운 상황에서 중국 기업과 다른 나라 기업에 비해 차별대우를 받고 있는 것을 증명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이 때문에 사태 악화를 막기 위해 우리 정부가 전면에 나서야 한다는 지적이 높다. 이참에 한중 FTA를 뜯어고쳐야 한다는 목소리도 커진다. 한중은 협정문에 올해 12월(발효 2년 내)까지 서비스와 투자 협정의 세부 내용을 후속 협상하기로 했다. 두 챕터 모두 현대차와 롯데마트, 금한령 등 우리 기업의 이해관계와 밀접한 사안이다. 이 변호사는 “현재는 사드 보복이 끝나기만을 기다릴 상황은 아니다”라며 “특별 공동위원회 등을 요구해 중국 정부에 할 말을 해야 보복조치의 수위가 낮아질 수 있다”고 강조했다. 한중 FTA는 양측이 합의하면 장관급 공동위를 열 수 있다. 바로 미국이 특별 공동위를 통해 한미 FTA 재협상을 공식적으로 요구한 것과 같은 절차다. /구경우·한재영·조민규기자 bluesquare@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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