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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암 이병철 30주기] 정미소서 '초일류 삼성'으로...호암의 도전정신, 산업화 기적 일궜다

"사회가 빈곤하면 개인도 불행"

소비재 → 중공업 → 전자까지

'사업보국' 경영 철학 실천

미래보고 반도체 선제적 투자

지금의 반도체 왕국 신화 창출







오는 19일은 우리 경제에서 전인미답의 길을 개척한 호암(湖巖)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 회장의 30주기다. 호암은 시대의 풍파 속에서도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과 도전정신으로 이제는 초일류기업이 된 삼성의 토대를 닦았다. 자본금 3만원으로 시작한 정미소 삼성상회에서 반도체 사업에까지 이르는 기적의 성장 스토리는 우리 산업의 발전사와 궤를 같이 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확고한 기업가 정신을 바탕으로 평생에 걸쳐 안주 대신 변화를 도모했던 호암의 생은 4차 산업혁명을 맞아 생존의 기로에 선 수많은 기업과 우리 사회에 많은 시사점을 던진다. 조동근 명지대 경제학과 교수는 “호암은 사업보국(事業報國)의 경영철학과 선도경영을 통해 삼성을 키웠다”며 “혁신보단 안정, 사회 공헌보단 일신의 안락을 추구하는 요즘 세태를 떠올리면 호암의 진가가 더 도드라질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정미업→소비재→중공업→전자·반도체까지=지난 1910년 2월 12일 경남 의령에서 4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호암은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스무살이 되던 해 일본으로 건너가 유학했다. 하지만 세계 대공황과 극심한 경제 혼란은 그를 중도 귀국해 사업가의 길로 가게 만들었다. 호암의 삶 궤적을 따라 가면 그의 인생 자체가 우리 산업사를 고스란히 반영함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성공한 기업인에게 미래 변화와 맞물린 사업 재편은 숙명과도 같은 것임을 깨닫게 된다. 호암의 사업 인생은 정미소로 출발했다. 이후 운수사업과 토지투자 사업으로 승승장구하던 그는 1937년 중일전쟁발발로 혹독한 실패를 겪는다. 이때 호암은 ‘사업은 반드시 시기와 정세에 맞춰야 한다’는 교훈을 얻게 된다. 호암은 6·25 전쟁 후 제조업에 진출했다. 제일제당(1953년)·제일모직(1956년) 등 수입 대체 소비재 생산에 나섰고, 여러 부침 속에 1968년 드디어 삼성의 간판격인 삼성전자(삼성산요전기)를 출범시켰다. 전자 사업에 발을 들여 놓은 후 호암은 삼성중공업(1974년)도 설립해 삼성을 전자와 중화학 분야의 큰 별로 키웠다. 마지막 퍼즐 조각은 반도체 진출. 호암의 나이 73세, 1984년의 일이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호암이 제일제당 설립 2년 만에 ‘거부’란 칭호를 얻었을 정도로 돈을 모았다”며 “하지만 사업의 목표가 단순히 축재 가 아니었기에 계속 새로운 사업을 모색하고 기업을 키워나갈 수 있었다”고 말했다.



호암은 사업을 ‘사회를 이롭게 하는 것’으로 봤다. 그의 자사전인 ‘호암자전’에는 “개인이 아무리 부유해도 사회가 빈곤하면 개인 행복을 보장받지 못한다. 나의 길은 사업보국에 있다”는 구절이 나온다. 호암 스스로 세계 최 극빈 국가의 기업인으로서 어떤 마음 자세로 기업을 운영했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조 교수는 “호암의 기업관은 기업에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요즘 분위기와도 맥이 닿아 있다”며 “시대를 앞서 간 기업인으로서 호암의 탁견”이라고 말했다.

◇호암의 투자 없었다면 반도체 왕국 삼성은 없어=반도체 제 3라인이 완공되기 2년 남짓 전인 1986년 초. 호암은 “돈 걱정말고 서둘러 라인을 완성해라. 미국의 보복이 빨리 시작될 것 같다”고 말했다. 실무진은 미국의 보복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몰라 어리둥절했다고 한다. 미국의 보복은 바로 무역제재. 당시 미국은 일본에 압력을 넣어 일본은 메모리 반도체 생산의 25%를 줄일 수 밖에 없었다. 256K D램 가격은 두 배로 폭등했고, 과감한 투자에 나섰던 삼성은 그 과실을 챙길 수 있었다. 기업가의 영민한 판단과 투자 리스크를 짊어지는 책임 있는 자세 등이 결국 기업 성패를 가르게 된다.

앞서 호암이 반도체에 뛰어든 과정도 기업가정신의 정수를 보여준다. 호암은 삼성반도체통신 기흥 VLSI공장 준공식에서 “일렉트로닉스 혁명에서 뒤쳐지게 되면 영원히 후진국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강조했다. 당시만 해도 빠른 제품 사이클, 막대한 투자 재원, 미국·일본 등과의 현격한 기술 격차 등을 고려하면 호암의 베팅은 도박에 가깝다는 비판이 많았다. 하지만 호암은 하이테크 산업의 문을 여는 선택을 감행했다. 1987년 11월 19일 향년 77세로 세상을 떠나기 고작 3년 전의 일이라는 점에서 그의 기개가 더 놀랍다. /이상훈기자 shlee@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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