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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통해 세상읽기] 畵中有詩, 詩中有畵(화중유시, 시중유화)

신정근 성균관대 유학대학장

그림을 보면 시가 떠오르고

시를 읽으면 그림이 떠오른다





올여름 더위가 만만치 않다. 여름이 더운 것은 당연하지만 예년과 달리 40도에 가까운 날씨가 연일 계속되고 있다. 이 때문에 올해의 더위를 폭염이라고 부른다. 비가 끝도 없이 내리면 폭우라고 하고 눈이 와 교통이 두절될 정도가 되면 폭설이라고 한다. 이처럼 기상 현상 앞에 ‘폭’자가 붙으면 그해 기상이 유례없을 정도로 심각해 사람에게 커다란 고통을 안겨줬다는 뜻이 된다.

올해 폭염이 지속되다 보니 예전과 다른 피서 현상이 나타난다. 여름이면 해수욕장은 사람이 발 디딜 틈 없이 북적이게 마련이다. 하지만 바깥 기온이 워낙 높다 보니 해수욕장에 가려는 엄두를 내지 못한다. 실내 물놀이 시설을 찾는 사람이 많아지고 있다. 기온이 피서 방식을 바꾸는 것처럼 사람의 생활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처럼 에어컨이 있는 실내를 선호하다 보니 자연히 도서관과 박물관을 찾는 사람도 늘어나고 있다.

도서관과 박물관을 찾을 때 빠른 속도로 걸음을 옮기기보다는 눈길을 끄는 한 작품 앞에서 가까이 다가갔다 뒤로 물러났다 하며 응시하는 방법을 취하면 좋겠다. 빠르게 걸음을 옮기면 훗날 다녀온 기억은 있지만 뭘 봤는지 기억이 제대로 나지 않는다. 반면 응시하는 방법을 취하면 훗날 한 작품을 둘러싼 이야기가 나올 경우 금방 연상이 일어난다. 후자의 방법과 관련해 소동파가 남긴 말을 공유하면 좋다. “그림을 보면 시가 떠오르고 시를 읽으면 그림이 떠오른다(화중유시·畵中有詩, 시중유화·詩中有畵).” 소동파는 왕유의 그림 ‘남전연우도(藍田煙雨圖)’를 보고 쉽게 눈길을 떼지 못하다가 왜 그런지 이유를 생각해본 것이다. 왕유의 그림은 그림으로 머물지 않고 소동파로 하여금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해 그 그림에 어울리는 시를 떠올리게 하고 그 시를 음미하게 됐다. 그러다 다시 시에서 그림으로 돌아오는 순환 과정을 겪은 것이다. 이러한 순환 과정에 들어서면 감상자는 자신이 지금 있는지 의식하지 못하고 그림과 시의 예술 세계로 빠져들게 된다.





지금 왕유의 진품을 볼 수는 없으니 고려 이규보의 시 ‘우물에 비친 달’을 읽으며 소동파의 체험에 다가설 수 있다. “산사의 스님 달빛이 탐나(산승탐월색·山僧貪月色) 병에 물과 함께 달빛을 담네(병급일병중·竝汲一甁中) 절에 이르면 깨달으리(도사방응각·到寺方應覺) 병을 기울이면 달빛도 없다는 걸(병경월역공·甁傾月亦空).” 산사를 찾은 적이 없는 사람도 시를 읽으면 어떤 상황인지 연상할 수 있다. 스님이 마실 물을 길으러 산골짜기나 약수터를 찾았다. 물 위에 한 점 티 없이 밝고 맑은 달이 반짝이고 있었다. 스님은 바가지로 달빛 아래에서 물을 조용히 퍼 가져온 병에 담았다. 달빛이 고운지라 물과 달을 함께 담는 것이 가능한지조차 따져보지 못했다. 하지만 산사에 이르러 물을 독에 부으면 물소리만 날 뿐 달빛은 어디에도 없다.

처음에 이 시를 읽으면 독자는 스님의 발걸음을 따라 함께 움직이고 함께 물을 병에 담는다. 그러다가 스님의 기대가 차갑게 깨진다는 것을 느끼는 순간 ‘욕심’과 ‘어리석음’이 생각난다. 이어서 독자는 더 이상 스님에게 주목하지 않고 시선을 자기 자신에게로 옮기게 된다. 가까운 나날을 굽어보고 이어 좀 더 먼 지난날과 지금을 비교하고 미래에 만날 자기 자신을 떠올리게 된다. 여기서 이규보 시의 스님은 어느 절에 있는 어리석은 스님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라는 것을 자각하게 된다. 이런 과정을 되풀이하다 보면 이규보의 시는 시에 그치지 않고 그림이 됐다가 사진이 되고 다시 한 편의 동영상이 된다. 이규보의 시를 처음 봤을 때 결코 나를 만나리라 예상하지 않았지만 시를 읽다 보니 결국 ‘나’라는 사람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소동파가 읊었던 ‘화중유시 시중유화’ 구절에 절묘하게 어울리는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더위를 피해 도서관과 박물관을 찾았다가 인생 사진처럼 이렇게 인생의 시를 만난다면 여름이 준 선물치고 괜찮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만난 인생 작품은 나를 풍요롭게 만드는 바탕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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