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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재양성 넘어 실용학문"…최태원 '한국판 카네기재단' 만든다

'최종현 학술원' 로드맵 밝힌 SK

선친 '한국고등교육재단' 진화

'아이디어 팩토리'로 연내 설립

사회·국제문제 등 다양한 연구

급변하는 글로벌 경영환경 대응





# 미국 뉴저지에 있는 노키아 벨연구소. 세계 최고 수준의 민간 연구개발 기관으로 1925년 설립된 후 3만3,000여개의 특허와 14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했다. 벨연구소는 벨시스템, AT&T 설립 이후 루슨트·알카텔을 거쳐 노키아에 이르기까지 기업의 손을 떠나지 않았다. 하지만 100년 가까운 벨연구소의 존재 가치는 기업의 이익이 아닌 인류의 진보를 위한 아이디어 창출에 있다.

# 미국의 국제문제 전문지 포린폴리시가 발표하는 글로벌 싱크탱크 순위에서 매년 1위는 브루킹스연구소이다. 1927년 세인트루이스의 사업가 로버트 브루킹스가 설립한 대내외 정책 연구소인 브루킹스연구소는 1930년대 뉴딜정책과 유엔 탄생, 마셜플랜에 이어 지난 1999년 주요20개국(G20) 회의 창설의 산실 역할을 했다. 브루킹스뿐 아니라 카네기국제평화재단·랜드연구소·헤리티지재단 모두 미국 기업이 설립한 싱크탱크다.

고(故) 최종현 SK 선대회장의 뜻을 기리기 위해 최태원 SK 회장이 제안한 ‘최종현 학술원(가칭)’이 이르면 올해 안에 윤곽을 드러낸다. 재계에서는 최종현 학술원이 대기업의 사회공헌활동 차원을 넘어 새로운 패러다임을 생산하고 방향을 제시하는 싱크탱크의 역할과 ‘아이디어팩토리’의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16일 재계에 따르면 SK그룹은 연내 설립을 목표로 최종현 학술원 설립 준비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아직은 초기 구상 단계지만 학술원의 성격에 대한 공감대는 그룹 내에 형성된 것으로 알려졌다. 재계 관계자는 “기존의 한국고등교육재단과는 방향이 다를 것”이라며 “연구 성과를 내는 학술재단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SK그룹은 학술원 설립을 올해 안에 마무리 지을 예정이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지난달 24일 서울 광진구 워커힐호텔에서 열린 최 선대회장 20주기 추모 행사에서 “선대회장은 무엇보다 먼 미래를 예측하고 준비하는 혜안과 변화를 만들어가는 도전정신을 그룹의 DNA로 남겨주셨다”며 “SK의 철학과 경영 시스템을 담아 만든 ‘SKMS(SK 경영관리체계)’가 경영 활동의 의미와 방법론에 대한 길잡이가 돼 지금까지 성장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어 “선대회장은 나라의 100년 후를 위해 사람을 키운다는 생각으로 한국고등교육재단을 설립해 이 땅의 자양분 역할을 하고 계시는 많은 인재를 육성했다”며 “저도 미약하게나마 선대회장의 뜻을 이어가고 고마움에 보답하고자 새로운 학술재단인 가칭 최종현 학술원을 만들겠다”고 말했다.



최종현 학술원은 기존 기업의 장학재단이나 연구소와는 성격이 다르다. 최 선대회장이 1974년 설립한 한국고등교육재단이 인재 양성에 방점을 찍고 있다면 학술원은 연구 성과에 초점이 맞춰진다. 한국고등교육재단을 통해 배출된 세계적 석학들과 국내외 연구자들을 기반으로 학술교류와 공동연구 등을 지원하고 국제적인 학술 네트워크의 중심지로 기능할 수 있다. 한국고등교육재단은 1974년 최 선대회장이 사재를 털어 설립했다. ‘일등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세계적 수준의 학자들을 많이 배출해야 한다’는 그의 뜻에 따라 44년 동안 747명의 해외 명문대 박사를 배출하고 3,700여명의 장학생을 지원했다.

고등교육재단이 인문학과 사회과학·자연과학 등 기초학문에 대해 인재를 양성하고 지원해왔다면 학술원은 융합학문과 실용학문이 중심이 될 것으로 보인다. 최 회장 역시 SK그룹의 글로벌 경영 전략인 ‘글로벌 파트너링’을 제대로 적용하기 위해서는 해당 지역에 대한 연구가 반드시 필요하다며 지역학이나 지정학에 높은 관심을 두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SK그룹의 한 관계자도 “구체적인 프로그램이 나와봐야 알 수 있다”면서도 “순수학문을 넘어서 사회문제·국제관계 등을 연구하고 다양한 학문과 연계하는 ‘크로스오버’ 연구들이 포함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최 회장은 이미 2000년부터 국제학술사업을 신설해 ‘국제학술교류지원사업’을 실시하고 있다. 중국과 아시아에서 17개의 아시아연구센터를 운영하며 세계적 수준의 학술포럼사업 등을 진행하고 있다.

논의 단계이지만 최종현 학술원의 종착지는 석유재벌 존 록펠러가 설립한 록펠러재단이나 철강왕 앤드루 카네기의 카네기재단, 마이크로소프트(MS)의 빌 게이츠가 설립한 빌&멀린다게이츠재단 같은 ‘글로벌 학술·연구재단’이 될 것이라는 예상이 지배적이다. 학문연구에 대한 지원은 기본이고 연구를 통해 여러 가지 사회문제와 국제문제에 대한 해결 방안 등을 사회에 제시하는 역할을 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이는 최 회장이 평소에 강조하던 ‘사회적 가치 창출’과 SK그룹의 자산을 사회와 함께 나눠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공유 인프라’ 철학과 맥이 닿아 있다. 일각에서는 SK그룹 대덕기술원과 연계된 기초과학 프로젝트에도 설립되는 학술원이 역할을 할 것이라는 전망도 내놓고 있다. 기업이 이익 창출을 위해 진행하는 연구개발(R&D)과 달리 한국의 미래를 위한 R&D가 이뤄질 수 있도록 지원이 뒤따를 것으로 예상된다. 조동성 인천대 총장은 “최 선대회장은 ‘인간은 무한하고 가능성을 가진 자원’이라고 늘 말했다”며 “학술원은 현재가 아닌 미래를 준비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재단 설립에 가장 중요한 재원 마련 방안은 아직 구체화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최근 대기업 공익재단에 대한 규제가 강화되는 상황이라 계열사에서 지원하기보다는 최 회장이 직접 사재를 출연할 것으로 보인다. SK그룹의 관계자는 “아직 구상 단계인 만큼 재원이나 조직 구성, 구체적인 사업 내용 등을 언급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라고 덧붙였다.
/박성호기자 junpark@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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