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직자가 노조활동을 할 수 있게 되면 기업들은 사업장 문란 등 큰 타격을 입을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공익위원들이 낸 합의안은 법 조문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고친다는 얘기도 없이 포괄적으로 ‘개정한다’고만 돼 있습니다. 경영계가 합의안에 섣불리 ‘합의’해주기 어려운 이유입니다.”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산하 노사관계제도관행개선위원회의 국제노동기구(ILO) 핵심 협약 비준 논의에 참여한 한 사용자 측 위원의 말이다. 개선위는 20일 ILO 핵심 협약 비준을 위한 공익위원 합의안을 내놓았다. 하지만 당초 문재인 정부가 바랐던 대로 노사정이 아닌 공익위원들의 합의에 그쳤다. 노사의 팽팽한 대립 속에 사실상 사회적 대화가 실패한 셈이다.
ILO 핵심 협약은 노동계 요구에 따라 정부가 비준을 약속한 국제규정이다. 한국은 현재 핵심 협약 중 근로자단결권(제 87·98호), 강제노동 폐지(제 29·105호)를 다룬 4개 조항을 비준하지 않고 있다. 지난 7월 개선위 출범 이래 노사는 단결권 조항을 두고 첨예하게 대립했다. 핵심 협약을 비준하려면 해직자의 노조활동 금지, 노조 전임자에 대한 급여 지급 금지를 규정한 국내 법률을 싹 고쳐야 하기 때문이다. 공무원·교원의 노조활동 인정도 노동계가 요구하는 쟁점 중 하나다.
정부는 개선위에서 노사정의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고자 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경영계는 개선위가 이미 “노동계에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며 합의의 실익이 없다고 판단했다.
발표 내용 자체가 세계적 추세와 어긋난다는 견해도 나왔다. 균형 추가 한쪽으로 쏠렸다는 것이다. 경제단체의 한 관계자는 “외국의 경우 실업자를 근로자로 규정한 입법례는 많지 않다”며 “독일 등은 단체협약으로 조합원 지위가 인정되도록 하지만 실업자 및 퇴직자의 근로자 지위를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조합원 지위를 유지할 수 있는 가능성을 부여한 정도”라고 설명했다. 한 재계 임원은 “21일 민주노총의 총파업을 앞둔 상황이라 민주노총의 눈치를 보는 것 같다”며 “앞으로 각 사업장이 자칫 노조 천국이 되지 않을까 매우 우려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노동계도 불만스럽기는 마찬가지다. 노동계는 보험설계사, 골프장 캐디 등 특수형태근로종사자의 노동권을 보장하는 법 개정을 요구했다. 하지만 이번 합의안은 “특수고용직 근로자의 노동권을 ILO 87호 원칙에 부합하게 보호하는 방안을 모색할 것”이라는 선에서 그쳤다.
이처럼 사회적 합의 도출에 실패한 개선위의 앞날도 가시밭길이다. 경영계는 근로자단결권을 보장하는 대신 파업권의 부분적 제한을 요구하고 나섰다. 핵심은 △노사 단체협약의 유효기간 증대 △직장점거 형태의 쟁의 금지△파업 시 대체근로 허용 등 세 가지다. 개선위는 이르면 연내, 늦어도 내년 1월까지 이에 관한 노사정 합의를 도출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그러나 거꾸로 “ILO 협약에 어긋난다”는 노동계의 반발이 크다.
이번 합의안이 국회에 제출된다 해도 여야 정치권의 대립이 심각해 실제 법 개정은 불투명하다. ILO 협약 비준에 반대하는 자유한국당은 20대 국회 후반기 환경노동위원장·고용노동소위원장·법제사법위원장 등 입법 절차의 길목을 모두 차지하고 있다. 경사노위의 한 관계자는 “현재 정치권의 상황을 보면 합의안이 원안을 유지하며 국회를 통과할 것으로 내다보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이종혁·김우보기자 2juzso@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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