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 규제개혁
4차 산업혁명에서 기술과 규제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라는 질문을 했다. 그리고 95% 이상이 기술보다 규제가 훨씬 더 중요하다고 답했다. 그런데 지금 대한민국은 기술개발에 20조원이 넘는 국가 예산을 투입하고 있는데 규제개혁 예산은 100억원이 채 안 된다. 왜 규제개혁이 안 되는가에 대한 대표적인 이유다.
모든 정부는 구호로 규제개혁을 부르짖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지난 20년간 규제는 늘었고 산업은 후퇴했다. 문제의 핵심은 규제의 기득권과 개혁권의 힘의 불균형이다. 규제로 기존의 이익을 지키는 세력은 다양한 형태로 조직돼 있으나 규제개혁으로 혁신을 이루려는 세력은 뿔뿔이 흩어져 추진력이 없다. 규제개혁에서 힘의 불균형의 결과가 한국을 글로벌 규제 왕국으로 등극하게 한 것이다.
곽노성 한양대 교수에 따르면 한국이 전 세계에서 최악의 규제 국가라고 한다. 네거티브 법 체계인 중국과 미국보다 못한 것은 당연하다. 포지티브 법 체계인 유럽은 그래도 규제의 논리와 일관성이 있고 예측 가능하다. 일본도 유럽 방식에서 미국 방식의 전략적 규제로 전환하고 있다. 개도국들은 역설적으로 규제가 강하지 않다. 그런데 한국은 각종 규제를 예측하기 어렵게 다층구조로 하고 있다.
구태언 테크앤로 변호사는 지난 2017년 투자분석 사이트인 피치북(pitchbook)에 공개된 전 세계 100대 유니콘 스타트업을 분석한 결과 40%는 한국에서 불가능하고 30%는 일부 사업모델을 포기하면 가능한 절름발이가 된다고 발표한 바 있다. 대부분의 글로벌 스타트업은 데이터 기반 O2O 융합사업 모델인데 한국의 데이터 쇄국주의의 결과로 이러한 기업들이 한국에서는 탄생하지 못한 것이다. 그 결과 고품질 일자리 창출 기회가 사라졌다.
김태윤 한양대 교수는 정치·관료·산업의 정관산 연합이 철의 규제 삼각지대를 형성하고 감사원이 규제의 윤활유를 뿌린다고 진단했다. 정관산 연합은 서로 비난하고 혼내면서 규제라는 이익의 꼭짓점을 협력하에 고수하고 있다고 지난 20년의 경험을 피력한 바 있다. 이에 반해 피규제자인 국민과 일반 기업들의 규제개혁 의지는 그냥 허공에 맴돌고 있다.
기존 기업들은 규제를 고수해 기득권을 보호받을 수 있다. 국회는 새로운 규제인 법률로 실적을 확보하고 정치자금을 마련한다. 공무원들은 규제를 통해 권력과 예산을 확보할 수 있다. 그리고 규제 법률 양산에 따른 사후관리는 형벌과 지자체로 전가한다고 한다. 규제가 정관산 연합체에 제공하는 이익에 비해 비용은 너무나 적다. 이러한 규제생태계의 이해관계가 규제만능주의로 한국의 미래를 가로막고 있다.
네거티브 규제는 박근혜 정부에서도 강력히 추진했으나 성과는 없다고 해도 좋을 정도다. 규제자유지역인 제주도의 실질적 네거티브 규제 구축 사례는 한 손으로 충분하다. 규제혁신 3법이 통과됐으나 실질적 성과에 대해서는 아직은 많은 우려가 있다. 결국 규제개혁의 핵심은 개별적 제도보다 규제생태계에서 힘의 균형을 바로잡는 것이 된다.
대한민국 역사상 실질적 규제개혁이 이뤄지고 전 세계 규제 연구의 대상이 된 역사적 사례가 있었다. 바로 김대중 정부의 규제개혁으로 1만건이 넘던 규제의 3분의1을 없앤 사례다. 한국 최초의 규제개혁 성공의 핵심은 대통령의 리더십이었다. 규제생태계의 힘의 불균형을 대통령의 힘으로 바로잡은 것이었다. 이를 위해 대통령 직속 규제개혁위원회를 공정위와 같은 수준으로 격상해야 한다. 그리고 연구개발비의 1%는 규제정책 연구에 투입하자.
그러나 언제까지나 대통령의 리더십에 규제를 맡길 수는 없다. 규제생태계의 힘의 균형을 위해 진정한 소비자운동이 발현돼야 한다. 국가에 요구하는 국민에서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는 국민이 돼야 한다. 4차 산업혁명에서 시민들이 참여하는 리빙랩과 소셜이노베이션이 중요한 이유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