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 2019시즌 개막전 다이아몬드 토너먼트 오브 챔피언스(TOC·총상금 120만달러) 최종라운드 3번홀(파3). 공동 선두로 출발했다가 1·2번홀 연속 보기를 적어낸 지은희(33·한화큐셀)가 그린을 놓쳤다. 뉴질랜드교포 리디아 고(22)에 2타를 뒤져 우승 다툼의 고비를 맞은 상황. 홀까지의 거리는 15야드 정도로 멀지 않았지만 심리적인 부담감이 클 수밖에 없었다. 지은희의 정교한 칩샷이 홀과 깃대 사이를 파고들어 버디로 연결됐고 이는 결정적인 분위기 반전의 계기가 됐다.
지은희가 새해 첫 대회에서 우승하며 ‘우상’ 박세리(42)의 최고령 우승 기록을 넘어섰다. 지은희는 21일(한국시간) 미국 플로리다주 레이크부에나비스타의 포시즌 골프클럽(파71·6,645야드)에서 열린 대회 4라운드에서 1타를 줄였다. 최종합계 14언더파 270타를 기록한 그는 이미림(29·NH투자증권·12언더파)을 2타 차로 제치고 정상에 올랐다.
지난해 3월 KIA 클래식 제패 이후 약 10개월 만에 수확한 지은희의 LPGA 투어 개인 통산 다섯 번째 우승. 특히 32세8개월인 지은희는 지난 2010년 5월 당시 32세7개월18일에 벨마이크로 클래식에서 박세리가 작성한 LPGA 투어 한국 선수 최고령 우승 기록을 새로 썼다. 그는 또 최근 2년간 우승 경력이 있는 선수만 출전한 왕중왕전의 초대 챔피언에 올라 우승상금 18만달러(약 2억원)를 받았다.
‘제2의 전성기’를 연 지은희의 노련미가 빛난 경기였다. 리디아 고와 공동 선두로 출발한 지은희는 보기 4개를 기록했지만 5개의 버디를 뽑아냈다. 이날 맑은 날씨에 기온이 뚝 떨어지고 강한 바람이 이어져 상위권 선수들이 고전했다. 지은희 역시 1·2번홀에서 1타씩을 잃어 출발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2018시즌 종료 후 스윙과 쇼트게임을 보강한 그는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 3번홀 칩샷 버디로 전열을 가다듬은 지은희는 이어진 4번홀(파4) 버디로 다시 승부를 원점으로 돌렸다. 전반을 공동 선두로 마친 지은희는 10번홀(파5)에서 버디를 잡아 단독 선두에 나섰고 후반 들어 갑작스럽게 흔들린 리디아 고의 추격에서 벗어났다. 마지막 경쟁자는 후배 이미림이었다. 후반에만 3타를 줄인 이미림이 1타 차 2위로 먼저 경기를 마쳤다. 지은희는 16번홀(파)에서 다시 노련미를 발휘해 사실상 승기를 잡았다. 256야드의 짧은 파4홀에서 드라이버 샷을 그린 앞까지 보낸 그는 어프로치 샷을 홀 1m 안쪽에 붙여 2타 차로 달아났고 그대로 정상 고지까지 내달려 ‘맏언니의 품격’을 완성했다.
‘화수분’처럼 신예들이 고개를 드는 한국여자골프에서 지은희는 독특한 존재다. 2005년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 투어에 데뷔해 2007년 2승을 거둔 그는 이듬해 LPGA 투어에 진출했고 2008년 웨그먼스 대회 첫 승에 이어 2009년 메이저대회인 US 여자오픈을 제패하며 스타덤에 올랐다. 하지만 이후 지독한 ‘우승 가뭄’에 시달렸다. 2017년 10월 스윙잉스커츠 타이완 챔피언십 우승까지 무려 8년여인 3,025일이 걸렸다. 긴 침체를 벗어난 후 지은희는 이번 대회까지 1년3개월 사이에 3승을 챙겼다.
30대 지은희에게 그냥 찾아온 행운은 아니었다. 매년 진화를 위해 스윙을 교정했다. 짧은 샷 거리를 보완하기 위해 백방으로 힘쓴 끝에 국산 샤프트인 ‘오토파워’를 만난 후 3승을 모두 수확했다. 철저한 자기 관리와 남다른 노력으로 13년째 LPGA 투어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지은희는 경기 후 기자회견에서 “원래는 서른 살까지 선수 생활을 하는 게 목표였다”며 활짝 웃었다. 그는 “지금도 계속 선수로 LPGA 투어에서 뛰고 있는 것이 정말 즐겁다”면서 “날씨가 약간 쌀쌀해 몸이 움츠러들어 1·2번 홀에서는 보기가 나왔던 것 같지만 내 스윙을 믿은 덕분에 3번홀 칩샷을 넣어 버디가 나오면서 자신감을 되찾았다”고 돌아봤다.
한편 지은희의 개막전 우승으로 한국군단의 한 시즌 최다승(15승) 경신 전망도 밝아졌다. 한국은 지난해 9승 등 최근 4년 연속 최다승 국가로 이름을 올렸다.
/박민영기자 mypark@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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