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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윤석의 영화 속 그곳] 마음의 창 열었다면…이별의 습작 썼을까

⑦서귀포 서연의 집-'건축학개론'

용기없어 이루지 못한 첫사랑

15년뒤 건축물로 뒤늦은 고백

영화 추억 담아 카페로 꾸며져

승민의 첫 키스·납뜩이 머핀 등

캐릭터 이름 딴 메뉴 등 '눈길'

카페 ‘서연의 집’을 찾은 방문객이 감상에 젖은 듯 유리창 너머 바다 풍경을 바라보고 있다.




카페 ‘서연의 집’을 찾은 방문객들이 안으로 들어가고 있다.


영화 ‘건축학개론’의 한 장면을 담은 전시물이 카페 ‘서연의 집’ 벽면에 걸려 있다.


영화 ‘건축학개론’의 스틸 컷.


‘건축학개론’의 시나리오는 영화로 만들어지기 전 5년 넘게 충무로를 유령처럼 떠돌아다녔다. 자극적인 요소 하나 없이 담백하고 제목까지 이상한 이 작품에 선뜻 투자하겠다고 나서는 용감한 회사는 어디에도 없었다. 건축학개론을 첫 작품으로 준비하던 이용주 감독은 결국 스타일이 완전히 다른 공포영화인 ‘불신지옥’으로 데뷔했다. 그는 참신하면서도 날카로운 메시지를 품은 이 영화로 재능을 알린 다음에야 어렵사리 투자사를 만나 건축학개론 제작에 착수할 수 있었다. 시나리오의 첫 장을 쓰고 꼬박 10년째 되던 해에 개봉한 후 400만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하며 멜로 영화 최고 흥행 기록을 세웠을 때 충무로에는 이 작품의 투자 기회를 제 발로 걷어찬 회사들의 곡소리가 넘쳐 흘렀다.

대학 시절의 첫사랑을 그린 ‘건축학개론(2012년)’의 촬영지는 제주 서귀포시에 자리해 있다. 남원읍 위미해안로에 늘어선 돌담길을 따라 한참을 들어가면 영화의 핵심 공간으로 등장한 ‘서연의 집’이 모습을 드러낸다. 지금은 여행객을 위한 카페로 꾸민 이곳은 건축학개론의 세 번째 주인공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중요한 장소다. 영화가 시작하면 서연(수지·한가인)은 15년 전 대학 신입생 때 건축학개론 수업을 같이 들었던 승민(이제훈·엄태웅)을 찾아가 제주도의 고향 집을 새로 지어달라고 말한다. 건축 설계사인 승민이 처음에는 부담스러운 듯 쭈뼛대다가 마지못해 부탁을 받아들이면서 두 사람은 과거로의 추억 여행을 시작한다.



영화 ‘건축학개론’의 장면들을 담은 전시물이 카페 ‘서연의 집’ 벽면에 걸려 있다.


영화 속 서연과 승민이 교감하며 함께 지은 카페로 들어서면 감독과 배우의 핸드프린팅 액자가 먼저 눈길을 끌고 벽면 곳곳에는 포스터와 스틸 컷으로 만든 전시물이 걸려 있다. 한쪽 벽 전체를 가득 채운 유리창 너머로는 구멍이 숭숭 뚫린 현무암을 벗 삼아 평온하게 흐르는 서귀포 앞바다가 보인다. ‘승민의 첫 키스’ ‘납뜩이 머핀’처럼 캐릭터의 이름을 딴 메뉴는 기분 좋은 웃음을 자아내고 시나리오 북과 스틸 컷 세트 등의 기념품도 마련돼 있다. 계단을 걸어 2층으로 올라가면 시원하게 트인 풍경을 눈앞에서 마주할 수 있는 옥상정원이 나온다. 영화에서 한가인이 일에 지쳐 깜빡 잠든 엄태웅을 그윽한 눈길로 바라보던 그 장소다. 정원의 테라스에 서서 추억에 잠기듯 눈을 감으면 바람에 실려 날아온 바다 내음이 콧속을 간질이고 가슴이 뻥 뚫리는 듯한 상쾌한 감각도 온몸을 휘감는다.

카페 ‘서연의 집’을 찾은 여행객이 옥상정원의 테라스에서 바다 풍경을 감상하고 있다.


건축학개론은 ‘대부분의 첫사랑은 실패하기 마련’이라는 연애의 오랜 명제에 관한 꽤 정확한 심리학적 통찰을 담고 있다. 스무 살의 승민은 괜한 자격지심과 사소한 오해를 떨치지 못하고 감정 표현에 적극적인 서연을 밀어낸다. 답답함이 치밀어 오른 관객은 당장 스크린으로 뛰어들어가 승민의 멱살을 잡고 “왜 속내를 털어놓지 못해!”라고 외치고 싶다가도 이내 마음을 고쳐먹는다. 어쩌겠나, 우리도 저 나이 때는 딱 승민만큼 바보 같고 어리숙했던 것을. 온통 그 사람 생각뿐인데도 정작 어떻게 마음을 살지 몰라 쩔쩔맸던 것을. 승민보다 의연하고 당당했던 서연은 관계가 소원해지고 첫눈이 내린 그해 겨울에도 약속대로 둘만의 비밀 공간이었던 동네 빈집으로 향했다. 흰 눈이 집 앞마당에 소복이 쌓일 때까지 기다려도 승민이 나타나지 않자 서연은 두 사람이 막 친해질 무렵 같이 들었던 전람회의 앨범과 CD플레이어를 빈집 마루에 놓아두고 자리를 떠났다.

사랑의 기억을 안고 살아가는 우리의 삶을 집 짓는 과정에 비유한 ‘건축학개론’의 에필로그를 장식하는 것은 역시 ‘서연의 집’이다. 노쇠한 아버지를 간호하기 위해 고향에 내려와 있는 서연에게 어느 날 택배 한 상자가 배달된다. 얼마 전 직장 동료와 결혼한 승민이 낯선 곳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 위해 외국으로 떠나면서 보낸 그 상자 안에는 15년 전 서연이 두고 간 CD플레이어와 앨범이 담겨 있다. 이 애틋하고 가슴 짠한 결말은 네가 홀로 외로이 기다리던 그 자리에 실은 나도 함께 있었음을, 네가 나를 사랑한 만큼 나도 너를 사랑하고 있었음을 전하는 수줍은 고백이다. 영화 속 주인공들은 해독 불능의 암호문을 이제야 풀었다는 듯 안도하며 과거를 깔끔히 정리하고 내일을 준비한다. 하지만 전람회의 ‘기억의 습작’을 배경음악으로 깔고 천천히 올라가는 엔딩 크레디트를 지켜보는 우리는 옛사랑의 기억에 괜스레 심란해지고 머릿속에는 물음표가 둥둥 떠오른다. “많은 날이 지나고 나의 마음 지쳐갈 때” 너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그때 “너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볼 수만” 있었다면 지금의 우리는 얼마나 달라졌을까. /글·사진(서귀포)=나윤석기자 nagija@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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