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8일 서울 코리아나호텔 7층. 윤증현 전 기획재정부 장관이 ‘육성으로 듣는 경제 기적 편찬위원회’ 5기 위원장 자격으로 단상에 섰다. ‘코리안 미러클’ 다섯 번째 시리즈의 발간 보고회였다. 이번 시리즈는 4대 사회보험제도의 도입 과정과 벤처 생태계 구축의 역사를 다뤘다. 편찬위는 지난 2017년부터 관련자의 증언을 토대로 집필 작업을 벌여왔다. 윤 전 장관은 “기록돼야 할 화두가 아직 많이 남아 있다. 6기 이후로도 계속되기를 희망한다”는 소회를 밝혔다.
그가 이런 말을 꺼낸 데는 이유가 있다. 여섯 번째 시리즈의 제작이 현재로서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한국개발연구원(KDI)과 편찬위가 ‘코리안 미러클’ 제작에 들어갔을 무렵인 2017년 5월, 정권이 바뀌자 국회는 이듬해 예산(2억원)을 끊어버렸다. 전작들이 주로 1960~1970년대 경제개발 역사를 증언한 것이 발단이었다. “경제개발 역사를 미화했다”며 지금의 집권여당이 발간 작업을 곱지 않게 본 것이다. 돈줄이 막히자 KDI는 결국 다른 데 쓸 돈을 줄여 책을 냈다.
“공식 기록은 있죠. 그러나 어떤 배경과 취지로 그런 제도가 마련됐는지는 기록되지 않았습니다(이종윤 전 보건복지부 차관).” 이날 보고회에 참석한 장차관 출신 관료 16명은 대부분 70~80대의 노인이었다. 사심이 없어 보였다. 김종대 전 건강보험공단 이사장은 강원 영월에서 농사를 짓고 있다고 했다. 자신의 증언으로 더 나은 정책이 생산되고 제도가 개선되기를 바라는 간절함이 그를 서울로 불렀다. 관료의 마지막 사명처럼 느껴졌다.
외환위기 극복 과정을 749쪽 분량으로 남긴 네 번째 시리즈의 편찬위원장이었던 고(故) 강봉균 전 재정경제부 장관은 예정보다 발간이 늦어지자 매우 초조해했다고 한다. 2016년 11월 말 발간 후 두 달이 지난 이듬해 1월 강 전 장관은 별세했다. 그는 “입관 때 책을 함께 넣어달라”는 말을 남겼을 정도로 애착을 보였다. 폐허의 대한민국을 경제 강국으로 일으켜 세운 옛 경제관료들의 육성을 남기는 것조차 정치적 이해득실을 따지는 현실은 비정상적이다. 이들의 육성은 2억원이 아니라 20억원을 써서라도 기록할 가치가 있는 국가적 자산이다./한재영기자 jyhan@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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