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정상회담 이후 북미 정상이 3차 회담을 동시에 거론하면서 하노이회담 결렬 이후 위태로웠던 북미대화의 불씨는 일단 살아났다. 그러나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하노이 때 같은) 궁리로는 백 번, 천 번 우리와 마주 앉아도 까딱도 움직이지 못할 것”이라며 미국의 ‘빅딜’을 강하게 거부한 반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빅딜에 방점을 찍고 있어 북미가 비핵화 방식에서는 여전히 평행선을 달리고 있다. 이르면 이번주 중 파견될 대북특사에 따라 앞으로의 정세가 판가름날 것으로 보인다.
일단 김 위원장의 시정연설을 뜯어보면 3차 북미회담에 대한 용의를 밝혔지만 미국식 빅딜에 완강한 거부 반응을 보였다. 김 위원장은 “싱가포르 성명 이행을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단계와 경로를 설정하고 보다 진중한 조치들을 취할 결심을 피력하며 미국의 화답을 기대했지만 미국은 전혀 실현 불가능한 방법에 대해서만 머리를 굴리고 찾아왔다”고 지적했다. 김 위원장은 “미국이 지금의 계산법을 접고 새 계산법을 갖고 우리에게 다가서는 것이 필요하다”며 “앞으로 공정한 내용이 있어야 합의문에 수표(서명)할 것이고 이는 전적으로 미국이 어떤 계산법을 갖고 나오는가에 달려 있다”고 강조했다.
반면 트럼프 대통령은 11일(현지시간) 한미정상회담에서 스몰딜 가능성을 열어두면서도 “현시점에서는 빅딜을 이야기 중”이라고 말해 여전히 빅딜에 무게를 두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남북미 정상회담 가능성에 대해 “김 위원장에게 달려 있다”고 말해 미북 양국이 서로의 입장 변화를 촉구하는 실정이다.
북한 최고지도자가 최고인민회의에서 시정연설을 한 것은 김일성 전 주석 이후 김 위원장이 처음이다. 글자 수로 1만8,000여자, 조선중앙방송 아나운서가 낭독한 시간은 47분이었다. 김 위원장의 육성은 공개되지 않았다. 김 위원장은 “미국이 우리 대륙간탄도로케트 요격을 가상한 시험을 진행하고 대통령이 직접 중지를 공약한 군사연습이 재개되고 있다”며 “매우 불쾌하게 생각한다”고 역설했다. 또 “대화로 문제를 해결하자면서도 적대감을 고조시키는 것은 기름으로 붙는 불을 진화해보겠다는 어리석고 위험한 행동”이라며 “미국의 적대시 정책이 노골화될수록 화답하는 우리 행동도 따라서게 돼 있다”고 경고했다.
북미가 비핵화에서 평행선을 달리며 문재인 대통령의 어깨는 무거워지게 됐다. 특히 김 위원장이 문 대통령을 겨냥해 압박하는 발언도 나왔다. 김 위원장은 “남조선 당국은 추세를 보아가며 좌고우면하고 오지랖 넓은 ‘중재자’ ‘촉진자’ 행세를 할 것이 아니라 민족의 일원으로서 제정신을 가지고 제가 할 소리는 당당히 하면서 민족 이익을 옹호하는 ‘당사자’가 돼야 한다”고 말했다. 또 “사대적 근성, 외세의존정책에 종지부를 찍고 모든 것을 북남관계 개선에 복종시켜야 한다”며 미국 눈치를 보지 말고 남북 경제협력 등을 과감하게 할 것을 촉구했다. 북한이 한국의 외세 배격을 요구한 적은 많았지만 김 위원장이 직접 거론한 것은 이례적이다. 북미 모두가 한국에 ‘같은 편’에 서줄 것을 요구하는 것으로 양국의 기대를 충족시키면서 접점을 찾아내기는 쉽지 않은 국면이 조성되고 있다.
청와대는 문 대통령이 중앙아시아 3개국 순방기간 중(16~23일)에라도 대화 모멘텀을 유지하기 위해 대북특사를 파견하는 것을 검토하고 있다. 이번 방미 때 동행한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이 유력하며 북한통인 서훈 국가정보원장도 거론된다. 특사는 트럼프 대통령으로부터 받았을 것으로 보이는 비공개 대북 메시지 등을 김 위원장에게 전달할 것으로 보이며 미국의 입장을 설명하고 남북정상회담을 타진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태규기자 classic@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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