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봇 산업을 둘러싼 국가 및 기업 간 경쟁이 치열한 가운데 국내에서도 핵심 기술을 보유한 기업들이 협력과 경쟁을 거듭하며 완성형 K휴머노이드 개발에 속도를 내고 있다. 실제 산업 현장에서는 '로봇 파운데이션 모델(RFM)'을 개발하는 기업이 하드웨어 개발 기업과 손잡는가 하면, 로봇 센서와 핸드(그리퍼) 개발 기업들은 품질과 단가를 놓고 경쟁을 벌이고 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탄탄한 로봇 생태계를 구축하고 해당 산업을 선도할 ‘챔피언’ 기업을 육성하는 것이 우리나라가 글로벌 시장에서 로봇 강국으로 도약하기 위한 핵심 과제로 떠올랐다.
휴머노이드 산업은 기존 자동차 산업과 비슷한 형태를 띠고 있다. 현대차(005380)가 부품 조립과 최적화 작업을 통해 완성차를 만든다면, 그 아래 자동차 시트와 내비게이션, 디스플레이, 각종 센서, 타이어, 배터리 등을 제조하는 다수의 협력사가 존재하는 것처럼 말이다.
먼저 휴머노이드 산업 성장을 위한 가장 시급한 과제로는 로봇의 두뇌 역할을 하는 RFM 개발이 꼽힌다. 휴머노이드가 스스로 생각하고 상황을 판단할 수 있도록 돕는 RFM의 개발 여부가 향후 관련 산업에서의 성패를 좌우할 핵심 요소로 평가된다. RFM의 경우 전 세계적으로도 몇몇 기업을 제외하고는 개발된 사례가 드문 영역이다.
산·학·연 전문가들이 모여 설립한 리얼월드가 대표적인 국내 RFM 개발 기업으로 꼽힌다. 지난해 7월 설립된 리얼월드는 제조업에 특화된 RFM을 개발하고 있다. 리얼월드는 산업 현장에서 사람의 손재주를 따라 할 수 있는 RFM을 개발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올해 말 데모 버전을 선보일 계획이다. 이를 통해 한국과 일본, 미국 등 주요 산업 현장에서 시범 테스트를 진행한다는 구상이다.
류중희 리얼월드 대표는 "휴머노이드 생태계에서 RFM이 가진 중요성을 고려했을 때 향후 관련 산업 피라미드 정점에는 로봇 AI를 뜻하는 RFM 기술이 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류 대표는 "경쟁력 있는 RFM이 탄생하기 위해선 대규모 자본과 인프라와 더불어 다양한 산업 현장에서 수집한 양질의 데이터가 필요하다"면서 "거대한 자본시장이 갖춰져 있고, 치열한 기술 경쟁이 진행되고 있는 글로벌 시장에서 승부를 봐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휴머노이드의 손에 해당하는 로봇 핸드 분야에서도 여러 국내 중소기업 및 스타트업이 기술 개발에 열중하고 있다. 특히 원익로보틱스, 테솔로 등 국내 기업들은 다양한 형태의 로봇 핸드와 촉각 센서를 결합한 고정밀 로봇 손을 개발하며 경쟁력을 키워가고 있다. 원익로보틱스는 자체 개발한 '알레그로 핸드'를 출시하고 시장 선점에 나섰다. 이 제품은 물체와의 접촉 시 발생하는 미세한 압력까지 정확하게 감지할 수 있는 점이 핵심 경쟁력이다.
테솔로도 휴머노이드 시장을 대상으로 다섯 개 손가락 구조의 'DG-5F'를 내놨다. DG-5F는 손가락 당 4개 관절로 구성된 총 20가지 모션을 구현한 만큼 사람의 손을 대체하는 작업이 가능하다는 것이 회사 측의 설명이다. 하드웨어 기술뿐 아니라 여러 물체의 특성을 고려해 움켜쥘 수 있도록 하는 파지 솔루션도 보유하고 있어 더욱 정밀한 작업에 로봇 핸드가 활용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김영진 테솔로 대표는 "로봇 핸드 분야 글로벌 선도 기업의 제품과 비교해도 자유도와 내구성 측면에서 뒤지지 않으면서도 훨씬 저렴한 가격에 양산할 수 있는 수준으로 기술을 개발했다"고 말했다.
에이딘로보틱스와 로보터스 등은 휴머노이드에 여러 감각을 불어넣어 줄 센서 기술을 개발하고 있다. 휴머노이드가 물건을 잡을 때 손끝에서 촉각을 느낄 수 있도록 해 더욱 정밀한 물류 작업을 가능케 한다. 또 이를 손목이나 발목에 힘 센서를 부착해 사람과 같이 더욱 자연스러운 움직임을 구현하겠다는 계획이다. 이윤행 에이딘로보틱스 대표는 “그동안 나온 휴머노이드들은 촉각이나 힘 센서 없이 시각 정보에 의존해 이동하거나 단순 반복 작업을 해왔다”면서 “향후 촉각이나 힘 센서가 탑재된다면 실제 사람의 움직임과 유사한 휴머노이드가 나올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아울러 로봇들이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자율주행 기술 기업들도 휴머노이드 시장의 핵심 축으로 자리 잡고 있다. 뉴빌리티, 베어로보틱스, 로보이츠 등 국내 자율주행 기술 기업들은 기존 물류·서비스 로봇에서 쌓은 자율주행 노하우를 기반으로, 휴머노이드 로봇의 다리와 발에 적용 가능한 이동 기술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모습이다.
스타트업들뿐 아니라 대기업들도 이러한 휴머노이드 시장에 속속 뛰어들며 기술 주도권 확보에 나서고 있다. 삼성전기(009150)와 LG이노텍(011070)은 로봇 눈에 해당하는 고해상도 카메라 모듈을, SK온과 LG에너지솔루션은 로봇 배터리 분야 기술 개발에 집중하고 있다. 두산로보틱스(454910), 한화로보틱스 등은 기존 협동로봇 기술을 바탕으로 로봇 팔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낼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또 이러한 요소 기술들을 조합해 완성형 휴머노이드를 개발하는 기업들에도 관심이 쏠린다. 국내 대표적인 기업으로는 삼성전자의 자회사인 레인보우로보틱스(277810)가 있으며, 스타트업 중에서는 에이로봇이 주목을 받고 있다.
한재권 한양대 로봇공학과 교수는 "휴머노이드는 매우 다양한 요소 기술들이 필요한 만큼, 전문 기술을 보유한 기업들이 모여 표준화를 진행하고 기술력 측면에서는 시너지를 내야 경쟁력을 가질 수 있다"면서 "머지않아 지금의 자동차 산업과 마찬가지로 국가 경제에 상당한 영향을 끼치는 산업으로 성장하게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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