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메뉴

검색
팝업창 닫기
이메일보내기

[여명] 너무 잘하지 마

송영규 여론독자부장

매년 인재 수천명 떠나는 한국

일 잘해도 칭찬·보상 고사하고

되레 견제 받거나 남의 일 떠맡아

일한만큼 성과 얻는 환경 조성을





연구자 A씨는 국내에서 생활할 때 자주 들었던 얘기가 있다. ‘너무 잘 하지 마.’ 그의 경험상 허튼 얘기가 아니었다. 잘한다고 손을 들었다가 대학에서는 선배의 숙제를 떠맡고 군대에서는 연애편지를 대신 썼다. 대학원에서 좋아하는 연구에 매달렸더니 사회생활을 제대로 못 한다고 핀잔을 들었다. 잘하면 부러움의 대상이 돼야 하지만, 남보다 더 열심히 하면 칭찬받아 마땅하지만 그를 둘러싼 환경은 그게 아니었다. 이용 대상이 되지 않으려면, 아무 이유 없이 견제를 당하지 않으려면 적당히 하고 ‘사회생활’에 적응해야 했다. A씨는 그러지 못했다.

수많은 좌절 끝에 그는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노력해서 발휘할 수 있는 능력의 최대치를 넘긴 다음에도 경쟁을 계속해야 한다면 그다음은 다른 사람의 능력을 깔아뭉개는 선택일 것이다. 우리 사회는 지금 경쟁으로 발휘할 수 있는 효율의 최대치를 진작에 넘어선 것이 아닐까.’ 그는 결국 한국을 떠나 이역만리 해외에서 직장을 잡았다. 그리고 말한다. 맘껏 잘해도 된다고 격려받는 회사에서 진심 어린 칭찬을 하는 동료와 함께 있어 행복하다고.

국내 대기업에 입사한 고등학교 후배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처음에는 일을 잘한다고 추켜세우더니 나중에는 자기에게 일감이 몰려왔다고 했다. 그래도 꾹 참고 그 많은 것을 다했는데 칭찬은 선배와 상사가 받고 자신에게는 일언반구도 없더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선배와 상사는 승진을 했다.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업무를 추진한 그에게는 아무 보상이 없었다. 그는 남들이 부러워하던 그 기업을 떠나 스타트업으로 자리를 옮겼다. 능력보다 정치를 잘하지 않기 위해.

우리나라의 두뇌 유출이 심각하다고 한다. 매년 수천 명의 인재가 우리나라를 버리고 미국으로 떠난다는 얘기가 나오고 63개국 중 20번째로 인재 유출이 많은 나라라는 통계도 있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인공지능(AI) 같은 분야의 인재가 필요한데 더 늘기는커녕 오히려 짐 싸들고 바다 건너 떠나고 있으니 걱정이 태산이란다.

여러 해법이 등장한다. 혹자는 핵심인재 육성에 정부가 나서야 한다고 주장하고 혹자는 인재에 대한 배려가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먼 미래를 내다보고 자유롭게 연구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는 조언도 나온다. 한마디로 ‘투자하고 기다리라’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과연 인재들이 우리 사회에 머물러 있을까.



최근 통계청이 청소년 관련 통계를 발표했다. 눈길을 끄는 대목이 있다. 우리나라 청소년의 절반 이상이 ‘우리 사회가 공정하지 않다’고 답했다는 점이다. 사회에 대한 신뢰도도 5.38점으로 낙제점을 면하지 못했다. 적어도 미래 세대의 눈으로 볼 때 우리 사회는 불공정하고 신뢰할 수 없는 곳이다. 충분한 능력을 갖고 열심히 일하면 원하는 성과를 얻는 현실을 경험하지 못한 결과다.

바뀔 수 있다는 희망이라도 있으면 견딜 수 있다. 하지만 현실은 이조차 허락하지 않는 모양이다. 아무리 열심히 준비해도 취업 문은 열리지 않고 설사 운 좋게 일자리를 구해도 상사의 눈에서 벗어나면 끝이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뼈 빠지게 일해도 결국은 문을 닫는 자영업자도 널려 있다.

얼마 전 서점가에 화제를 불러일으킨 책이 있다. 제목은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 여기서 저자는 아무리 노력해도 바뀌지 않는 현실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열심히 한 방향으로 노를 젓는데 커다란 파도가 나를 다른 곳으로 데려다 놓는 것 같다”고. 그래서 그는 선택한다. ‘내 맘대로 살아보자.’

노력해도 바뀌지 않는, 불공정하고 신뢰하기 힘든 사회에서 택할 수 있는 것은 포기 아니면 탈출 둘 중 하나다. 능력이 외면당하는 불합리가 사라지지 않는 한, 그래서 우리 앞에 놓인 선택지를 다양하게 만들지 않는 한 우리나라는 항상 위기다. /skong@sedaily.com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주소 :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6 트윈트리타워 B동 14~16층 대표전화 : 02) 724-8600
상호 : 서울경제신문사업자번호 : 208-81-10310대표자 : 손동영등록번호 : 서울 가 00224등록일자 : 1988.05.13
인터넷신문 등록번호 : 서울 아04065 등록일자 : 2016.04.26발행일자 : 2016.04.01발행 ·편집인 : 손동영청소년보호책임자 : 신한수
서울경제의 모든 콘텐트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복사·배포 등은 법적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Copyright ⓒ Sedaily, All right reserved

서울경제를 팔로우하세요!

서울경제신문

텔레그램 뉴스채널

서울경제 1q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