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문화와 콘텐츠 산업에서 영역을 구분하는 것은 이제 무의미한 일이 됐습니다. 다양한 플랫폼에 적응하는 것은 현대 예술가의 숙명이며 창작자들은 스토리텔링의 본질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각 플랫폼이 요구하는 바를 유연하게 수용해야 합니다.”
일리야 흐르자놉스키(44), 샤쿤 바트라(36), 에르베 데메흐(36), 청위쓰(38) 등 지난 2일 서울 용산구 그랜드 하얏트 서울에서 만난 각국의 젊은 영화인들은 급변하는 콘텐츠 산업의 미래에 대한 전망과 혜안을 들려줬다. 이들은 한국이미지커뮤니케이션연구원(CICI)이 주관하는 ‘문화소통포럼(CCF) 2019’ 참석을 위해 최근 방한했다.
러시아 출신의 영화감독인 흐르자놉스키는 지난 2004년 발표한 데뷔작 ‘4’로 로테르담 국제영화제 타이거상을 받았으며 현재 영화·연극·미술 등 다양한 분야를 오가며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바트라는 가족영화 ‘카푸르 앤 썬스’로 인도에서 가장 권위 있는 시네마 축제인 ‘필름 페어 어워드’에서 최우수 스토리상을 비롯해 5관왕을 휩쓴 인도의 유명 감독이다. 그는 영화를 주로 연출하면서도 구글·폭스바겐·필립스 등 글로벌 기업의 광고 제작에 참여하고 있다. 청위쓰는 중국의 영화 프로듀서로 ‘상하이 콜링’ ‘007 스카이 폴’ ‘나는 여왕이다’ 등을 제작했다. 캐나다에서 온 데메흐는 세계 최고의 단편영화제인 프랑스 클레르몽 페랑 국제 단편영화제에서 주목받은 뒤 현재 장편 데뷔를 준비하고 있는 차세대 연출자다. 지난해에는 부산국제단편영화제 심사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바트라 감독은 “넷플릭스와 같은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가 촉발한 플랫폼의 다양화 추세는 점점 더 가팔라질 것”이라며 “다른 모든 것이 그렇듯 예술 창작의 환경도 시대에 따라 변화하기 마련”이라고 설명했다.
흐르자놉스키 감독은 “불과 20년 전만 해도 지하철에서 모바일로 영화를 감상하는 혁명적인 시대가 도래하리라고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다”며 “디지털 기술의 발전은 결국 보다 많은 대중이 더 자주 문화와 예술을 즐길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라고 낙관했다. 청 프로듀서는 “영화 제작자로서 기본적으로 스크린에서 상영되는 작품에 우선 관심이 가지만 OTT가 등장하면서 다양한 플랫폼을 활용하는 방식에 대해서도 깊이 고민하고 있다”고 전했다.
세계 최고 권위의 칸국제영화제가 베네치아영화제와는 달리 올해 넷플릭스 기반의 작품을 초청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모두 대수롭지 않다는 반응을 보였다. 바트라 감독은 “지금은 넷플릭스가 막 부상하는 시기라 칸영화제와 OTT 간에 경계가 그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불과 몇 년 뒤에는 상황이 완전히 달라질 것”이라며 “제아무리 칸영화제라도 시대의 변화를 어떻게 거부하겠는가”라고 반문했다.
이들은 대화의 주제가 콘텐츠 산업의 전망에서 한국영화로 옮겨가자 아이처럼 눈빛을 반짝이며 각자 좋아하는 작품과 감독들을 줄줄이 읊었다. 청 프로듀서는 자신의 휴대전화에 담긴 ‘한국영화 리스트’를 직접 보여주면서 “2003년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고 회상했다. 그는 “그 작품을 보고 ‘이제 아시아 영화도 할리우드와 유럽을 넘어 세계 영화계의 중심으로 우뚝 설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다”며 “그때부터 한국영화를 마치 공부하듯이 찾아보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도가니’ ‘엽기적인 그녀’ ‘암살’ ‘설국열차’ ‘명량’ 등 깊이 사랑하는 한국영화가 헤아릴 수 없이 많다”며 “특히 ‘암살’ 제작진이 중국 상하이에서 촬영했을 때 한국 영화인들의 전문성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 현장에 구경을 간 적도 있다”고 고백했다.
이에 질세라 데메흐 감독은 “데뷔작인 ‘초록 물고기’부터 최근작인 ‘버닝’까지 이창동 감독의 모든 작품을 다 봤다”며 “가장 좋아하는 영화는 ‘시’”라고 말했다. 그는 “시나리오와 연기, 촬영과 편집 등 모든 측면에서 완벽함을 추구하는 이창동은 인간 내면을 끈질기게 성찰하는 진정한 예술가”라고 추어올렸다. 그러자 청 프로듀서는 “봉준호나 박찬욱처럼 장르영화 안에서 혁신을 시도하는 감독과 이창동처럼 깊이 있는 예술영화 감독이 공존하면서 조화를 이루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라고 거들었다. 비교적 할리우드는 거대 자본이 투입되는 블록버스터에, 유럽은 진중한 성찰을 담은 작가주의 영화에 강세를 보이는 것과 달리 충무로는 다양한 장르에서 골고루 빼어난 실력을 발휘한다는 칭찬이다. 바트라 감독은 “인도의 ‘발리우드’는 고유한 지역성을 유지하면서도 세계적인 보편성을 획득한 한국영화의 사례를 연구하면서 참조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나윤석기자 nagija@sedaily.com 사진=성형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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