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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경제소사] 테르모필레 전투와 영화 '300'

BC 480년...영화는 허구투성이

테르모필레 전투 묘사도. /위키피디아




지난 2007년 개봉된 영화 ‘300’은 허구로 가득하다. ‘자유를 지키려는 그리스 용사 300명 전원이 전사하면서 페르시아의 백만대군을 물리쳤다’는 줄거리는 진실일까. 페르시아의 특수부대인 ‘임모탈’은 영락없이 중세 일본의 ‘닌자(忍者)’와 닮았다. 역사와 판타지를 섞은 이 영화는 시기와 주제 하나만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다. 기원전 480년 8월9일 테르모필레에서 소수의 그리스연합군이 다수의 페르시아군과 대적해 전멸한 것은 사실이다. 영화는 병력 차이를 300명 대 100만명으로 설정했으나 어림없는 얘기다.

역사가들이 추정하는 그리스 병력은 최소한 8,000명 이상. 스파르타 시민 병사 300명과 스파르타에 거주하는 외국인 1,000명, 국영 노예 900명에 인근 도시국가에 모여든 6,000여명의 중무장 보병이 있었다. 그리스군 병력이 2만여명에 이르렀다는 추정도 있다. 그리스 측을 상대한 페르시아군의 추정 규모는 7만~30만명 수준. 추정투성이인 것은 원사료 자체가 의심스럽기 때문이다. ‘역사의 아버지’라는 헤로도토스가 양쪽의 병력 차이를 5,200명 대 528만3,220명이라고 ‘역사’에 기술했으니.



테르모필레 전투는 역사를 바꿨을까. 글쎄다. 아무리 호의적으로 산출해도 테르모필레에서 일주일 동안 발이 묶였던 페르시아군의 병력 손실이 약 2만명, 그리스군의 사상자는 4,000여명으로 추산된다. 테르모필레를 넘은 페르시아군은 승승장구하며 아테네까지 점령했다. 이런 페르시아군이 고향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던 것은 살라미스 해전에서의 완패로 대병력의 병참선을 유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영화의 과장이 심해도 테르모필레와 살라미스 전쟁이 남긴 게 있다. 19세기 독일 철학자 게오르크 헤겔은 ‘역사철학’에서 이 전쟁을 ‘정신의 힘이 물질의 양보다 우월하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입증한 최초의 사례’라고 썼다.

자유로운 인간이 그렇지 못한 인간들보다 용감하게 싸운다는 얘기다. 그리스 시민 출신 중장갑 보병은 근대국가 국민개병제의 모범으로 살아 있다. 영화에서 반나체에 피어싱을 주렁주렁 한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그려진 페르시아 황제 크세르크세스 1세는 구약 ‘에스더서’에도 ‘아하수에로’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아내 에스더의 간청에 따라 유대인들을 살려준 페르시아 왕이 바로 크세르크세르 1세다. 동족을 살리려 기도한 끝에 죽음을 무릅쓰고 실행에 나서는 에스더의 결의(에스더서 4장16절)가 우리의 가슴에도 울리기를 소망한다. ‘죽으면 죽으리라.’
/권홍우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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