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종목 시세보기

서울경제

HOME  >  오피니언  >  기획·연재

[오늘의 경제소사] 밀비우스 다리의 전투

중세 천년과 기독교 세상을 연 전투

[오늘의 경제소사] 밀비우스 다리의 전투
교황청 사도 궁전에 걸린 줄리오 로마노의 1521년작 ‘밀비우스 다리의 전투’.

312년 10월28일 로마 북방 13㎞ 삭사 루브라(붉은 자갈밭) 평원. 로마제국 황제들의 군대가 맞붙었다. 브리타니아와 갈리아 지방에서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온 콘스탄티누스와 이탈리아 반도와 아프리카를 지배하는 막센티우스. 태양이 하나인 것처럼 둘은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로마제국의 서방 정제(正帝)를 자처해왔기 때문이다. 병력에 대해서는 설이 많다. ‘4만 대 9만’부터 ‘10만 대 13만’까지 다양하지만 확실한 것은 방어하는 막센티우스 쪽이 1.5배 많았다는 점. 콘스탄티누스는 국경 방어 병력을 남겨두고 출정했어도 자신감이 넘쳤다.

안전한 후위에 진을 친 막센티우스와 달리 콘스탄티누스는 선두에서 정예 기병대를 이끌었다. 팽팽하게 대치하는 것 같던 전투는 곧 콘스탄티누스군의 압도적 우세로 바뀌었다. 신병이 대다수인 막센티우스 군대는 ‘야만족’과 싸움으로 단련된 고참병들에게 속속 쓰러졌다. 전의를 잃은 대군이 오합지졸로 변해 도달한 곳이 밀비우스 다리. 길이 135m, 폭 8.75m인 돌다리에 한꺼번에 몰린 패주병들은 서로 밟혀 죽거나, 떠밀려 다리에서 떨어져 강에 빠지거나, 추격군의 창칼에 찔려 죽었다.

승리한 콘스탄티누스(당시 37세)는 세 살 아래지만 손위 처남이던 막센티우스의 시신을 강에서 건져내 목을 잘라 창끝에 꽂고 로마로 들어왔다. 막센티우스를 지지했던 원로원 귀족들이 새로운 지배자의 환심을 사려고 새롭게 꾸민 건축물이 바로 개선문이다. ‘밀비우스 다리의 전투’는 규모나 기간으로 보면 인간이 치른 수십만 번의 전투 중 하나에 불과하지만 역사상 가장 중요한 전투로 손꼽힌다. 콘스탄티누스가 십자가 표식(라바룸)에 관한 꿈을 꿔서 싸움에 이겼고 박해받던 기독교가 공인받는 계기로 작용했기 때문이다(꿈이 아니라 전투 중에 천사가 나타났다는 저술도 있다).

‘콘스탄티누스의 꿈’은 후대에 지어낸 얘기일 가능성이 제기되지만 처형을 앞둔 32대 교황이 바로 풀려나는 등 기독교가 박해에서 풀렸다는 점만큼은 분명하다. 전략·전술 측면에서도 의미가 없지 않다. 중장갑 보병의 시대가 저물고 기병 중심의 중세시대를 여는 전주곡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말을 사고 먹이며 무장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을 감당할 수 있는 계층이 전쟁의 중심이 되기 시작했다는 얘기다. 여류 작가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인 이야기’에서 밀비우스 다리의 전투에 대해 이런 평가를 내렸다. ‘천년 동안 이어질 중세로 가는 문을 연 전투이자 오늘날까지 지속되는 기독교 세계를 향한 발자국.’
/권홍우선임기자 hongw@sedaily.com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XC
이 기사를 공유하세요.

이메일 보내기

보내는 사람

수신 메일 주소

※ 여러명에게 보낼 경우 ‘,’로 구분하세요

메일 제목

전송 취소

메일이 정상적으로 발송되었습니다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