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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언스] 미륵사지석탑, 3D 스캐닝으로 실측·해체..1,400년된 부재도 신기술로 되살려

■ 익산 미륵사지 석탑 복원·왕궁리 유적에 담긴 과학

기존 부재 금속 보강·강화처리

일제가 바른 콘크리트 떼내고

하중 고려해 6층까지만 보수

복원 후 무게만 1,830톤 규모

왕궁리 유적도 보수·발굴 한창

백제도성 유물 1만2,000점 출토

올해 일반에 공개된 미륵사지 석탑(서탑). /고광본 선임기자




익산 미륵사지를 위에서 찍은 모습. /사진제공=국립문화재연구소


동양 최고(最古)·최대(最大) 석탑인 익산 미륵사지 석탑(국보 11호)이 18년의 해체, 보수정비를 끝내고 올해 일반에 선보였다. 최근 주말에 이곳을 찾았는데 우선 용화산 아래 미륵사(彌勒寺) 부지가 21만5,000여㎡(6만5,000여평)에 달할 정도로 넓어 놀라웠다. 백제 무왕(재위 600~641년) 때 창건된 이 사찰에는 두 개의 석탑과 한 개의 목탑이 있었는데 올해 보수를 마친 서탑(14.5m)이 미륵사지의 상징 격이다. 다만 남아있던 6층 모양대로 너무 깨끗하게 복원돼 옛 정취는 찾기 힘들었다. 역시 석탑인 동탑(28m)은 터만 남아 있다가 지난 1990년대 9층탑으로 복원됐는데 중앙의 49m가량으로 추정되는 목탑은 자리만 남아 있었다.

각각의 탑 뒤에는 부처님을 모신 3개의 금당(金堂)이 있는데 주춧돌만 남아 있고 금당으로 들어가는 길에 있던 ㄷ자 모양의 회랑(지붕이 있던 긴 복도)도 터만 있었다. 부지 서쪽에는 서탑을 보수하고 남은 부재나 미륵사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던 주춧돌이나 기단부, 동탑 부재가 1,500개가량 보관돼 있었다. 마당에는 주요 행사가 있을 때 내걸던 깃발 등을 걸어두던 대형 당간지주 2개가 옛 모습대로 버티고 있었다.

조상미 익산시청 학예연구사는 “미륵사지 상부 건축구조를 알 수 있는 자료가 없어 중국이나 일본 등과 연계해 국립문화재연구소가 고증하고 있다”며 “회랑 복원에 관한 기본연구는 돼 있으나 가상현실(VR) 등 첨단기법을 쓰려고 해도 기본 건축형태를 알아야 금당 등 전체를 복원할 수 있다”고 밝혔다.

삼국유사는 “서동이 왕위에 오른 뒤 왕비 선화와 함께 사자사에 가던 중 용화산 아래 연못에 이르자 물에서 미륵상존이 나타나 왕비의 간청으로 연못을 메워 탑과 불전을 각각 세 곳씩 세우고 미륵사라고 했다”고 전한다. 1756년 영조 32년에 나온 금마지(金馬志)에는 “높이가 10여장(丈·한 장은 3.33m)이고 동방에서 가장 높은 석탑이라고 속설에 전한다. (통일신라 시대) 벼락 친 곳 서쪽 반은 퇴락했다. 흔들렸지만 큰 탑은 이후 더 이상 무너지지 않았다”고 돼 있다.

올해 복원을 마친 석탑은 부재 1,627개, 폭 12.5m, 무게 1,830톤 규모인데 당초에는 목탑이었다. 일제는 1915년 석재들이 일부 무너져 내린 자리를 185톤에 달하는 콘크리트로 발랐다. 이후 1999년 문화재위원회는 석탑 해체·보수를 결정했고 국립문화재연구소가 2001년 지붕돌인 6층 해체에 돌입해 2009년 완료했다. 석탑을 모두 들어 올리자 사리봉영기가 발견됐는데, ‘좌평 사택적덕(沙宅績德)의 딸이자 백제 왕후’가 639년 건립했다는 게 밝혀졌다. 하지만 삼국유사에 미륵사 창건을 무왕과 그의 왕비이자 신라 진평왕의 딸인 선화공주가 했다고 돼 있는 것과 맞지 않아 ‘서동요’ 설화의 주인공인 서동이 무왕이 아닌 동성왕이나 무령왕일 수 있다는 주장도 나왔다. 정헌율 익산시장은 미륵사지에서 기자와 만나 “무왕이 태어나 자란 금마 일대는 미륵사와 왕궁 유적은 물론 왕실사찰인 제석사, 피난처인 오금산성(익산토성) 등이 있다”며 “무왕의 왕후가 선화공주도 맞고 사택적덕의 딸도 맞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1917년 일제시대에 찍은 미륵사지 석탑(서탑).


지난 2000년 수리 전 남동 측에서 본 미륵사지 석탑(서탑).


미륵사지 석탑(서탑) 해체 전 3D스캔을 하는 모습.


정헌율(가운데) 익산시장이 정재숙(오른쪽) 문화재청장 등 문화재 위원들에게 미륵사시 석탑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 /사진제공=익산시청


석탑 복원 과정에서 1990년대 주춧돌 상태에서 복원한 동탑처럼 9층으로 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으나 남아 있는 6층을 일부 무너진채로 그대로 복원하자는 의견이 주를 이뤘다. 대신 1,2층은 완전 복원했고 기초도 추후 9층까지 복원할 수 있게 튼튼히 했다. 훼손된 부재는 과학적으로 보강해 옛 부재 중 81%를 재사용했고, 새 부재는 익산의 화강암(황등석)을 썼다.

석탑 해체시 실측을 한 것은 물론 구조와 각 부재에 대해 3D(3차원) 스캐닝을 실시했다. 도면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다. 부재는 1,400년 가까이 돼 풍화가 심해 오염물 세척과 균열 충전, 금속 보강, 신석재 성형, 접합, 강화처리 등의 순서로 보존 처리했다. 배석희 익산시청 역사문화재과장은 “절단되거나 유실된 부재도 많아 문화재연구소가 콘크리트를 일일이 떼어내고 다시 탑을 세우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고 전했다.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과 왕궁 터 유적. /고광본 선임기자


미륵사지에서 5㎞ 떨어진 왕궁리(王宮里) 유적도 찾았는데 이곳 역시 미륵사지와 함께 2015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공주와 부여 유적까지 총 8개)된 곳이다. 유적지로 들어서자 정면에 백제 탑의 특징이 엿보이는 왕궁리 5층 석탑이 자리한 것을 볼 수 있었다. 정작 왕궁터는 곳곳에 주춧돌만 남아 있었고 외곽 담장이 일부 복원돼 있었다. 1989년부터 발굴이 진행되고 있는데 왕궁 남측은 의례·의식·정무·생활을 위한 건물이 동서 4개 석축으로 나뉘어 있었고 북측은 정원·후원·공방터·화장실터가 있었다. 조 학예연구사는 “중국 육조시대 책으로 일본에서 발견된 관세음응험기에는 ‘무왕 때 지모밀지로 천도하고 제석사를 지었다’고 돼 있는데 제석사지를 발굴하니 책의 내용과 비슷했다. 지모밀지도 익산의 옛 이름인 금마저와 어원이 유사하다”고 설명했다.

왕궁리 유적에서는 수도를 의미하는 수부(首府)라는 도장이 찍힌 기와가 출토되고 다양한 유리제품과 금제품 등 도성에서만 출토되던 유물이 쏟아졌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화장실 유적에서는 오늘날의 좌식 변기 모양의 토기도 나왔다. 출토된 유물은 1만2,000여점이다. 유적 발굴로 지금은 무왕이 부여에서 천도해 수도로 삼았다가 아들인 의자왕 때 다시 부여로 돌아갔다는 설이 힘을 얻어가고 있다는 게 조 학예연구사의 설명이다. 정 시장은 “무왕이 숨진 뒤 익산 쌍릉에 모셔져 무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아들인 의자왕이 왕궁을 원찰로 만든 게 아니냐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고 전했다. /익산=고광본 선임기자 kbgo@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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