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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색인문학]대륙 열차속에서 '한국어 루쉰' 탄생하다

■학교서 배우지 않은 문학이야기

- 청녀혁명가 유기석 '광인일기'(1927)

박진영 성균관대 교수·국어국문학

어린시절 북간도로 간 유기석

15세때 도산의 흥사단 입단했지만

억압·지배 맞서 자유·해방의 꿈

아나키스트 혁명가로 방향 틀어

1927년 베이징~톈진 기차에서

루쉰의 '광인일기' 번역 마무리

펜·총 함께 들고 대륙 떠돌아다녀

동광 휴간 직전 유기석이 번역한 루쉰의 ‘광인일기’.




베이징과 톈진을 잇는 열차 한구석. 아직 앳된 얼굴의 조선인 청년은 원고지에 마침표를 찍고 날짜를 꾹꾹 눌러썼다. 1927년 6월11일 토요일. 오랫동안 간직해왔던 마지막 한 문장을 비로소 내려놓았건만 가슴은 그때보다 훨씬 더 쿵쾅댔다. ‘사람을 먹어보지 못한 아이가 혹 아직도 있을 것이다. 아이를 건지자…….’

중학교 1학년짜리 눈에는 도무지 모를 말이었다. 사람을 잡아먹는다니…, 아이를 건져야 한다니…. 하지만 이듬해인 1919년 3월13일 아침에는 깨달을 수 있었다. 조선에서 휘몰아친 만세의 함성이 북방의 국자가(局子街), 지금의 옌지 한복판에 이르렀을 때다. 소년은 20명 남짓한 동무들과 두 달 동안 만세를 불렀다.

소년이 ‘광인일기’를 처음 읽은 것은 쫓겨온 땅 북간도에서다. 루쉰이 ‘광인일기’를 발표한 이듬해 아직 사람을 먹어보지 않은 북간도의 아이들은 만세를 외쳤고 5·4운동이 중국을 바꾸기 시작했다. 터질 듯한 가슴을 누르며 몇 번이고 읽다가는 자기네가 먼저 미쳐버릴 것 같던 그때 동무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누군가는 연해주로 향하고, 누군가는 만주 산악으로 숨어들고, 누군가는 상하이로 떠난다 했다.

긴 터널에 이제 막 들어섰을 뿐이다. 스물두 살 청년을 태운 기차는 어디로 가는 길인가. ‘광인일기’를 번역하고 있는 젊은 조선인 앞에는 어떤 운명이 기다리고 있을까.

1925년 20세의 유기석.


기차간에서 루쉰을 번역한 청년의 이름은 유기석. 황해도 금천에서 태어난 유기석은 어린 시절에 북간도로 떠나왔다. 일찍이 의병활동을 펼치던 부친이 망명해 국자가에 학교를 세우고 독립운동을 이어갔기 때문이다. 3·13만세시위에 뛰어든 유기석은 곧장 상하이로 내려가서 도산 안창호를 만나 흥사단 원동위원부에 입단했다. 고작 열다섯 살 때였다. 유기석이 중학교를 졸업한 곳은 난징, 대학을 다닌 것은 베이징에서다.

베이징에서 유기석은 뜻밖의 망명객들을 만나고는 했다. 일본에서 탈출한 조선인 비행사 안창남도 그중 하나다. 유기석은 안창남이 독립운동을 위해 세운 비행학교에 들어갔다. 얼마 뒤에 안창호를 수행해 따라나섰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기도 했다. 곧 풀려난 유기석은 소련 우수리스크로 갔다가 베이징으로 돌아왔지만 이때부터 전혀 다른 꿈을 꾸기 시작했다.

1927년 6월11일 토요일 기차간에서 루쉰의 ‘광인일기’를 번역하던 유기석은 상하이를 등지기로, 안창호와 결별하기로 마음먹었다. 유기석은 난징으로 가서 한중일 아나키스트들의 조직에 뛰어들었다. 루쉰이 아나키스트였던가. 물론 그렇지 않다. 루쉰이 절규했듯이, 국자가에서 부르짖었듯이 유기석은 다시 한번 아이를 구하는 길을 찾을 따름이었다. 모든 권위와 억압과 지배에 맞서 싸우는 상상력만이 진정한 자유와 해방을 안겨줄 것이므로.



유기석이 1929년 중국에서 펴낸 ‘약소민족의 혁명방략’.


젊은 혁명가는 드넓은 대륙 곳곳을 떠돌아다녀야 했다. 때로는 기자이자 교사였으며, 때로는 유격대원이요 광복군이었다. 한 손으로 저술을 펴내는가 하면 다른 한 손으로 치열한 지하공작을 감행했다. 일본이 만주를 점령하고, 난징에서 대학살을 벌이고, 상하이를 침공하는 내내 유기석은 펜과 총을 놓지 않았다.

베이징과 톈진 중간의 어디쯤에선가 번역된 ‘광인일기’는 루쉰의 첫 번째 소설이자 식민지 조선의 독자들이 처음 만난 루쉰이기도 하다. 중국 안에서 번역됐지만 세계 최초로 중국 바깥에 소개된 루쉰 소설이라는 영예도 남겼다. 만약 유기석이 혁명을 꿈꾸지 않았다면 ‘광인일기’는 한국어로 탄생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공교로운 일은 또 있다. 유기석의 번역이 실린 것은 흥사단 기관지 ‘동광’ 1927년 8월호다. 유기석은 열차에서 내리자마자 서둘러 조선으로 원고를 보낸 것이 틀림없다. 그런데 이 호를 끝으로 ‘동광’은 3년 반 동안 장기 휴간에 들어갔다가 겨우 속간된 뒤 다시 2년 만에 폐간됐다. 하마터면 식민지 독자들은 ‘광인일기’를 만나지 못할 뻔했다.

만년의 유기석.


이국땅으로 내몰린 중학생을 달뜨게 만든 대문호 루쉰의 본명은 저우수런(周樹人)이다. 유기석은 자신의 필명을 류수런(柳樹人)이라 썼다. 그리고 빛나는 청춘의 30년 세월을 그 열혈의 이름에 고스란히 바쳤다. 유기석은 해방 후 서울에 잠깐 다녀갔을 뿐이다. 난생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역사학자로 대학 교단에 선 유기석은 1980년 중국에서 타계했다.

루쉰은 짐작이나 했을까. 북간도 어느 교실에서 자신의 ‘광인일기’를 돌려 읽는 피 끓는 조선인 중학생들이 있으리라는 것을, 그 가운데 한 명이 기차간에서 ‘광인일기’를 서투른 모국어로 번역하는 청년으로 성장하리라는 것을, 그리고 루쉰의 나라에서 해방과 혁명을 위해 한평생을 기꺼이 바치리라는 것을….

박진영 성균관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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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영규 기자 여론독자부 skong@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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