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일 오후9시6분. ‘예산안 날치기’라는 문구가 적힌 피켓을 든 자유한국당 의원들의 고성 속에 512조3,000억원의 내년 예산안 통과를 알리는 방망이 소리가 본회의장에 울려 퍼졌다. 사실 이인영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가 이날 오전 “한국당과 협의가 이뤄지지 않으면 ‘4+1(민주당·바른미래당·정의당·민주평화당+대안신당)’의 수정안을 상정하겠다”고 말했을 때도 이런 일방처리를 예견한 국회 출입기자들은 거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전례가 없었다. 한국당의 한 의원은 “여당이 심의 과정에서부터 야당을 따돌리고 예산안을 강행처리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전했다.
현장을 보고도 잘 믿기지 않는 일이 일어났지만 여기서 국민의 혈세로 편성되는 예산안의 강행처리를 주도한 민주당, 앞서 예산안 합의를 필리버스터(합법적 의사진행 방해) 철회 조건으로 내걸면서 그 단초를 제공한 한국당, 어느 쪽의 잘못이 더 큰지 따지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보다 양당 모두에 책임을 묻고 싶은 것은 수많은 ‘민생법안’의 발목을 잡았다는 점이다. 이날 본회의에서 통과된 민생법안은 어린이 교통안전 강화를 위한 민식·하준이법이 고작이다. 4차 산업 역량 강화를 위한 ‘데이터 3법’과 중소기업 등의 애로 해소를 위한 ‘탄력근로 단위기간 확대법’ 등은 결국 언제 처리될지도 모를 처지에 놓였다. 이날뿐 아니라 정기국회 기간(9월2일~12월10일)을 놓고 봐도 통과된 법안 수는 839개로 2017년(1,174개), 2018년(1,340개)에 비해 현저히 적다.
그렇다면 이렇듯 예산안이 제1야당이 모르는 ‘깜깜이’ 상태에서 처리되고 무수한 민생법안이 본회의에 오르지조차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정치의 실종이 원인이다. 하지만 이 같은 원인진단을 통해 정치권에 협치를 해달라고 주문하고 말기에는 정치권의 ‘선의(善意)’를 좀처럼 믿기 힘든 게 현실이다. 보다 현실적인 개선 방안을 찾기 위해서는 선거법 개정안과 공수처 설치법 등 패스트트랙(신속처리안건) 처리 과정에서의 여야 충돌, 그로 인한 정국 마비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 실제 ‘패스트트랙 정국’은 결과적으로 동물·식물국회를 야기했고 수많은 민생법안을 삼킨 게 사실이다.
민생법안이 발목 잡히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패스트트랙 도입 등을 골자로 하는 ‘국회선진화법’을 개정해야 한다. 2012년 개정된 국회법은 △다수당의 날치기 법안 처리와 물리적 충돌 방지 △필리버스터를 통한 소수의견 개진 기회 보장 △패스트트랙을 활용한 효율적인 법안 심의 도모 등 개정 취지 가운데 그 어느 것도 살리기 힘들다는 게 올해 입증됐다. 패스트트랙과 필리버스터 제도를 폐지하고 ‘다수결’ 의결이 가능하도록 하게 하는 국회법에 따라 상임위원회의 만장일치 관행만 깨도 이렇게 많은 민생법안이 사장되지는 않을 것이다. 다수의 폭거는 선거를 통해 심판하면 된다. /jhlim@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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