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일 별세한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은 재계에서 처음으로 스스로 회장직을 후진에게 물려줘 대한민국 기업사에 성숙한 후계 승계의 모범 사례를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구 명예회장은 지난 1995년 2월 스스로 경영일선에서 물러났다. LG와 고락을 함께 한 지 45년, 회장에 오른지 25년 만이었다. 이는 국내 최초의 대기업 ‘무고(無故) 승계’로 기록되며 재계에 신선한 파장을 일으켰다.
아직 은퇴를 거론할 나이가 아닌 시기에 그 같은 결정을 내린 것은 경영혁신의 일환으로 경영진의 세대교체가 필요하다고 결심한 데 따른 것이었다.
이는 당시 WTO 체제의 출범 등 본격적인 무한경쟁 시대를 맞아 글로벌화를 이끌고 미래 유망사업을 전개하기 위해서는 젊고 도전적인 사람들로 세대교체가 이루어져 이들이 주도적으로 추진해 나가야 한다는 판단을 했던 것이었다.
구 명예회장은 퇴임에 앞서 사장단에게 “그간 혁신을 성공시킬 수 있는 기반을 다지는 노력을 충실히 해왔고 그것으로 나의 소임을 다했으며, 이제부터는 젊은 세대가 그룹을 맡아서 이끌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며 퇴임 의사를 표명했다.
1995년 2월 회장 이·취임식장에서 구 명예회장은 “돌이켜 보면 행운보다는 고통이, 순탄보다는 고난이 더 많았던 세월이었지만, 임직원들의 헌신적인 노고가 늘 곁에 있었기에 용기와 신념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또 ”끊임없는 변화와 혁신이 요구되는 이 시점에서 여러분을 믿고 나의 역할을 마치고자 한다. 젊은 경영자들과 10만 임직원에 대한 믿음이 있기에, 기쁘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나의 자리를 넘기고자 한다”고 덧붙였다.
구 명예회장은 이 같은 이임사를 끝으로 임직원들의 기립 박수를 받으며 식장을 빠져 나갔다. 경영일선에서 물러난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구 명예회장이 회장에서 물러날 때 창업 때부터 그룹 발전에 공헌을 해 온 허준구 LG전선 회장, 구태회 고문, 구평회 LG상사 회장, 허신구 LG석유화학 회장, 구두회 호남정유에너지 회장 등 창업세대 원로 회장단도 동반 퇴진을 단행했고 이러한 모습은 당시 재계에 큰 귀감이 되었다.
구 명예회장에게 은퇴는 그가 추진해 온 경영혁신의 일환이었다. 그는 훗날 회고에서 “은퇴에 대한 결심은 이미 1987년 경영혁신을 주도하면서부터 형성되기 시작했다. 새로운 경영 환경에 대응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 차기 회장에게 인계한다는 것이 경영권 승계에 대한 내 나름의 밑그림이었다. 그래서 내 필생의 업으로 경영혁신을 생각하게 되었고, 혁신의 대미로서 나의 은퇴를 생각했던 것이다”라고 밝혔다.
/이재용기자 jylee@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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