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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명]동백이에게 있고 수남이에겐 없는 것은

신경립 문화레저부장

달동네 서민의 삶 닮은듯 하지만

서로 돕고 정나누는 이웃의 유무가

해피엔딩·불행 가른 결정적인 요소

연말 먼저 손내밀며 온기 나눠보길





종영 한 달이 지나도록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의 인기가 아직 식지 않은 듯하다. 출연 배우들은 예능부터 CF까지 종횡무진하고 있고, 연말 방송가 결산에서는 드라마와 주연 배우들의 이름이 빠지지 않는다.

나 역시 뒤늦게 ‘동백꽃…’에 빠져들었던 한 사람이다. 어수선한 사회 분위기에 찬바람까지 불기 시작하면서 이래저래 심란하던 차에 드라마가 주는 위로와 즐거움이 적지 않았다. 편견과 ‘팔자’를 긍정의 힘으로 이겨낼 수 있다는 희망, 평범한 사람들의 선의가 모여 이뤄내는 작은 기적에 대한 기대, 아무리 힘들어도 세상은 여전히 따뜻하고 아름다운 곳이라는 위안의 메시지는 나뿐 아니라 많은 시청자를 홀렸다.

물론 현실은 드라마와 다르다. 고아에 가난한 미혼모인 동백이가 자영업자로 성공하고, 한결같이 자신을 사랑해주는 남자와 결혼해 아들을 메이저리거로 키워내는 ‘완벽한 해피엔딩’을 현실에서 기대하기는 힘들다. 동백이는 엄마의 보험 해약금 덕에 가게 건물을 인수해 ‘월세지옥’에서 해방되지만, 드라마보다 드라마틱한 반전이 없는 한 우리 사회에서 가난한 미혼모가 빈곤의 굴레를 벗어나기는 쉽지 않다. 지난해 인구보건복지협회 조사에서 양육 미혼모의 월평균 소득액은 92만3,000원. 그나마 근로소득이 있는 사람은 10명 중 4명뿐이었다.

동백이가 사는 동네, 옹산은 또 어떤가. 평소에는 따돌리고 구박하는 듯하면서도 김장 때면 꼬박꼬박 김치를 챙겨주고, 위기가 닥치면 똘똘 뭉쳐서 가족처럼 발 벗고 나서주는 동네 아줌마들의 오지랖은 판타지에 가깝다. 현실은 훨씬 각박하고 차갑다. 수십, 수백세대가 사는 아파트에서 알고 지내는 이웃이 몇 명이나 있나. 보건복지부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사회로부터 고립된 채 혼자 죽어간 고독사가 2,000명에 달했다고 한다. 앞으로 더 늘어날 게 뻔한 숫자다. 옹산에 정착하지 않았다면 동백이가 과연 해피엔딩을 맞을 수 있었을까.



문득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라는 잔혹영화가 생각났다. 2015년 개봉돼 누적관객 4만4,000명에 불과했던 소규모 독립영화라 본 사람이 많지 않을 것 같으니 간단히 내용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주인공 수남은 실업계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취업하고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가지만, 계속되는 불행으로 빈곤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식물인간이 된 남편의 병원비 때문에 빚에 허덕이는 수남은 대출로 어렵사리 마련한 달동네 집이 재개발 구역으로 지정될 가능성에 모든 희망을 걸지만, 재개발에서 누락된 이웃들의 반대로 이마저 가로막힐 위기에 놓이자 끝내 미쳐 이웃들을 살해한다.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거듭되는 불운과 경제적 궁핍, 열악한 가정환경이라는 면에서 동백이와 수남이는 일맥상통한다. 가장 큰 차이라면 ‘사람’이다. 동백이 인생에서 사람이 기적이 된 것과 달리, 수남의 삶을 더욱 끔찍하고 삭막하게 만드는 것은 사람과의 단절이다. 수남이는 철저하게 혼자다. 이웃 주민들은 그의 처지에 관심을 갖고 도움을 주기는커녕 재개발 보상문제로 서로 의심하고, 기만하고, 비방하고, 폭력을 휘두른다. 영화 속 수남이가 사는 달동네는 서민들의 디스토피아다.

현실이 영화만큼 암울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냉혹하지만 그래도 이따금 온기가 느껴지기도 하는 이 세상은 아마도 따뜻한 옹산과 수남이의 달동네 사이의 어디쯤일 것이다. 그런데 경기가 악화하고 사회에 대한 불신이 고조되면서 우리가 사는 이곳이 점차 수남이의 디스토피아에 가까워지고 있는 것 같다. 남을 돌아볼 여유는 점점 없어지고, 커지는 이기심과 불안감 속에 이웃은 갈등과 경계의 대상이 된 지 오래다. 한 지방자치단체의 여론조사에서 ‘사람을 신뢰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 긍정적 응답은 2017년 70%에서 55%까지 낮아졌다고 한다. 서울 광화문 한복판에 서 있는 ‘사랑의 온도탑’은 34도를 겨우 넘겼을 정도로 싸늘하고, 텅 빈 구세군 자선냄비에서는 공허한 종소리만 하염없이 울린다.

연말이다. 며칠 남지 않은 올해가 가기 전에 본척만척 지냈던 이웃에게 먼저 인사 한마디 건네보자. 가혹한 현실 앞에 무너지고 있을 누군가에게 조금은 관심을 기울여보자. 티끌 같은 행동이 모인다면 새해에는 우리 사회가 조금 더 온기를 찾고, 어떤 수남이는 동백이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klsin@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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