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생활사박물관은 필자가 재직 중인 학교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7호선과 6호선이 만나는 태릉입구역 5번 출구 앞 예전 북부법조단지 부지를 활용해 지난 2019년 7월에 개관했다. 곧 가봐야겠다고 벼르기만 하다가 해가 바뀌고 나서야 출근길에 들를 수 있었다. 3층으로 이뤄진 아담한 규모의 박물관은 1950년대 이후 급격한 변동이 일어난 서울이라는 공간 속에서 보통 사람들이 어떻게 일상생활을 영위했는지를 보여준다. 한국 현대사는 대통령과 장군, 학생운동 지도자들이 만든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는 전시였다. 사람들의 생활상을 알기 위해서는 포고문이나 경제개발계획안이 아니라 그들이 사용한 사물에 주목해야 한다. 특히 도시락과 책가방, 학용품과 장난감 등은 당대 학생들이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를 간접적으로나마 알 수 있게 해준다.
전시품 중 1990년대 이후 빠른 속도로 변모한 각종 통신기기가 눈에 띄었다. 시간이 갈수록 점점 크기가 작아지는 휴대폰도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1990년대에 크게 유행한 무선호출기의 모습은 지난 30년 동안 우리의 일상생활에 얼마나 큰 변화가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물건이었다. 보통 ‘삐삐’라고 불렀던 무선호출기를 내가 처음 갖게 된 것은 대학 2학년이던 1994년의 일이었다. 그로부터 1년 전 처음 대학에 입학했을 때만 해도 학과 동기 60명 중에 삐삐를 가지고 있던 친구는 많아야 서너 명뿐이었다. 그러던 것이 불과 1년 만에 그 수가 대폭 증가했다. 그 변화는 학과 연락처 명단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신입생 시절의 연락처는 대개 자택이나 하숙집·자취방의 유선 전화번호였다. 그 이듬해에는 대부분의 동기생들이 012나 015로 시작되는 무선호출기 번호를 갖게 됐다.
당시에 내가 사용하던 무선호출기는 모토로라의 제품이었다. 1990년대 초 한국에서 한창 유행하던 제품은 모토로라 ‘브라보’ 모델이었다. 직사면체 모양의 검정색 바디 위쪽에 달려 있는 액정 화면을 통해 숫자로 된 메시지가 전달됐다. 이 모델은 특히 직장인들 사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클립을 이용해 허리띠에 고정시킬 수 있었는데 허리춤에서 꺼내 들지 않아도 메시지를 확인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나는 이 모델이 너무 아저씨 같다는 생각이 들어 굳이 같은 회사에서 나온 다른 모델로 선택했다. 모델명은 기억나지 않으나 부드러운 유선형의 사다리꼴 모양이었고 색상도 다양한 것들 중에 선택할 수 있었다. 가격은 십몇 만원 정도였고 매달 사용료로 만원 정도가 나갔던 것으로 기억한다. 작은 건전지 하나를 넣으면 한동안 사용할 수 있으니 지금의 스마트폰처럼 충전기에 매달려 있을 필요도 없었다. 1994년에 구입한 제품을 1998년 입대할 때까지 사용했다.
무선호출기는 매우 단순한 테크놀로지다. 무선호출망을 통해 신호가 발신되면 단말기를 통해 0부터 9까지의 숫자로 나열된 신호를 수신한다. 요즈음 스마트폰을 통해 초당 몇 기가바이트의 신호를 스트리밍할 수 있는 것과 비교하면 극도로 제한된 통신 대역폭이다. 무선호출기의 역사는 1921년 미국 디트로이트 경찰이 순찰 중인 경찰관에게 메시지를 전달하는 기기를 개발하면서 시작됐다. 1949년에 미국의 발명가 알 그로스는 뉴욕시 유태인 병원에서 응급환자에 대응하는 의사들을 호출하기 위한 장치를 발명해 특허를 받았다. 이렇게 초기의 무선호출기는 경찰·소방관·의사 등이 비상상황에서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것이었다. 심지어 1964년 RCA 연구소에서 액정 디스플레이 기술을 개발하기 전까지 무선호출기는 메시지를 표시하는 기능도 없었다. 미리 약속된 메시지를 신호음에 따라 파악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특수 용도로만 사용되던 무선호출기가 일반인들에게 허용되기 시작한 것은 1958년의 일이었다. 새로 열린 무선호출기 시장을 독점하다시피 한 회사가 모토로라였다. 모토로라는 제2차 세계대전 중 미군에 무전기를 납품하면서 통신기기 업계의 주요 기업으로 성장했고 이후 무선호출기와 휴대폰으로 이어지는 수많은 히트작을 남겼다. 무선호출기를 ‘페이저(pager)’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도 모토로라였다. 이 말은 ‘심부름을 하는 소년 하인’이라는 뜻을 가진 라틴어 ‘파기우스(pagius)’에서 왔다. 나이 어린 하인이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숨 가쁘게 뛰어다니던 일을 전파 신호가 대신하게 됐던 것이다. 이후 미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에서 무선호출기 사용자 수가 급격하게 증가했다. 1980년 무렵에 그 수는 약 320만명으로 늘었고 1994년이 되자 그 스무 배 가까운 6,100만명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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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일반인이 무선호출기를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은 1982년의 일이었다. 그동안 ‘특수목적’에 해당하는 용도로만 사용할 수 있도록 제한했던 것을 일반인에게 허용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를 위해 한국전기통신공사는 서울 을지전화국에 무선호출취급국을 설치했고, 우선 300명의 가입자를 받아 서울 지역을 중심으로 시범 운영한다는 계획이었다. 무선호출기 가입자는 1992년 87만명, 이듬해인 1993년에는 250만명으로 폭증했다. 한국 사회에 삐삐가 광범위하게 퍼지기 시작하자 그에 따른 여러 사회현상이 생겨나기도 했다. 대학 입학시험이 ‘선지원 후시험’으로 바뀌면서 원서접수 창구에서 이른바 눈치작전을 펼칠 때 무선호출기가 일제히 이용돼 불통 사태를 빚었다. 상당수가 가명·차명으로 가입해 각종 범죄에 악용되는 경우도 있었다.
한국 ‘삐삐 열풍’의 가장 큰 특징은 무엇보다도 가입자의 연령대가 점점 낮아졌다는 데 있었다. 처음에는 업무상 연락을 주고받아야 할 필요가 있는 직장인이 많았지만 점차 대학생과 고등학생들이, 이후에는 초등학생까지 무선호출기를 갖는 것이 유행이 됐다. 한편으로 이러한 변화는 특정한 테크놀로지가 갖는 사회적 의미가 빠르게 바뀔 수 있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19세기 말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이 처음 전화 사업을 시작했을 때 유선전화는 사무용 통신기기로 받아들여졌다. 이후 일반 가정에까지 전화가 확산되면서 ‘전화’라는 사물이 갖는 의미가 달라졌고 그에 따라 전화 통화를 주고받는 에티켓까지 변화하게 됐다. 마찬가지로 무선호출기는 경찰이나 의사 등이 ‘특수목적’으로 사용하는 기기에서 직장인들의 업무용 기기로, 나아가 대학생과 청소년들이 사적 용도로 사용하는 통신기로 자리 잡았다.
다른 한편으로 젊은 세대의 무선호출기 유행은 한국 젊은이들의 주거형태와 연관이 있어 보인다. 18세만 되면 부모의 집을 뛰쳐나가 독립된 가구를 형성하는 문화라면 무선호출기의 기능을 유선전화에 자동응답기를 달아 대신할 수 있다. 하지만 1990년대 한국의 대학생들은 많은 경우 부모와 함께 거주했기 때문에 부모로부터 자신의 사생활을 지키기 위해 무선호출기를 선호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삐삐가 젊은이들 사이에서 유행하자 그들만이 알아볼 수 있는 ‘삐삐 은어’가 생겨나기도 했다. 당시의 기성세대들은 ‘1126611’이라는 메시지가 ‘사랑해’라는 의미라는 것을 상상할 수조차 없었을 것이다. 야심한 시간에 부모의 눈과 귀를 피해 집 앞 공중전화 박스에 쭈그리고 앉아 연인에게 음성메시지를 보내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던 때였다.
그로부터 몇 년 후 무선휴대폰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무선호출기는 등장할 때보다 빠른 속도로 자취를 감췄다. 하지만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없다고 해서 아예 없어진 것은 아니다. 2017년 현재 의료기관 종사자들을 중심으로 3만여명의 가입자가 여전히 삐삐를 사용하고 있다. 이렇듯 한번 자리 잡은 테크놀로지는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다.
/서울과기대 교수·과학잡지 ‘에피’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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