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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사 오디세이] ‘교활한 디크’ 닉슨은 대통령에서 어떻게 물러났나

■워터게이트 특종 뒷얘기

번스틴·우드워드 등 현장기자의 2년간 탐사추적보도

브레들리 편집장·그레이엄 편집인 지원으로 빛을 봐

리차드 닉슨 미국 제37대 대통령. 교활한 디크(Tricky Dick)라는 별명으로 불릴 정도로 권모술수에 강한 정치인이었지만 워터게이트 스캔들로 미 역사상 처음으로 사임한 대통령이 되는 불명예를 안았다./AP연합뉴스




교활한 디크(Tricky Dick). 미국 제37대 대통령인 리차드 닉슨(1913~1994)의 별명이다. 닉슨은 1952년 드와이트 아이젠하워가 대통령에 출마할 당시 부통령 후보였다. 그는 불법적인 사전 선거 운동으로 고발됐지만 TV 토론에서 능수능란한 말과 교묘한 논리로 이를 피해 나갔고 이후 ‘교활한 디크’로 불리기 시작했다. 닉슨은 1962년 캘리포니아 주지사 선거에서 낙선한 후 눈물을 흘리며 “이제부터는 기자 여러분이 이리 차고 저리 차고 할 리처드 닉슨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며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하지만 이를 뒤집고 다시 정계에 복귀한다.

교활한 디크라는 별명이 다시 본격적으로 회자된 건 10년 뒤인 1972년. 재선에 골몰하던 닉슨 캠프는 워터게이트 호텔에 마련된 민주당 사무실을 도청한다. 워터게이트 사건이 터지자 닉슨은 본인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며 변명으로 일관했지만 결국 증거가 나오면서 2년 뒤 대통령직을 사임한다. 닉슨이 1974년 8월 8일 기자회견에서 대통령직 사퇴를 공식 발표하자 사람들은 “역시 교활한 디크” 라며 조소를 보냈다. 정치 인생 내내 교활한 디크라는 별명답게 권모술수로 위기를 넘겼던 닉슨을 낙마시킨 힘은 무엇이었을까.

◇워터게이트의 시작부터 ‘교활한 디크’의 항복 선언까지=1972년 6월 17일. 워싱턴 D.C. 워터게이트 빌딩에 있는 민주당 선거본부 사무실에 불법 침입했던 괴한 5명이 경찰에 체포된다. 대통령 재선위원회 직원들로 민주당 지도급 인사의 전화에 도청장치를 달고 민주당 선거 전략이 담긴 문서를 빼내기 위해 침입한 것이었다. 백악관은 “3류 도둑 사건에 불과하다”며 즉각 반박했지만 불법 도청을 지시한 사람은 누구인지, 비용은 어떻게 조달됐는지, 목적이 무엇인지에 대한 의혹은 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에 주목한 언론은 거의 없었다.

실제 이 사건은 닉슨의 재선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했다. 같은 해 11월 7일 갤럽 여론 조사에서 미국 인구 절반 이상이 워터게이트 사건에 대해 들은 바 없다는 응답이 나온 것이다. 결국 닉슨은 민주당의 조지 맥거번 후보를 누르고 압도적인 승리를 거둔다.

그러나 워터게이트 사건에 대한 의혹의 불씨는 꺼지지 않았다. 1973년 2월 7일. 닉슨 재선위원회의 불법 행위와 부정 자금, 정치 속임수에 대한 소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면서 샘 어빈 상원의원을 위원장으로 하는 닉슨 선거 운동에 관한 특별조사위원회가 설치됐다. 그러나 교활한 디크라는 별명처럼 닉슨은 이를 전면 부인한다. 4월 30일 TV 연설에서 백악관이 관련되었다는 사실을 은폐한 것을 자기는 전혀 몰랐다고 강조한 것이 대표적이다.

그럼에도 워터게이트 사건의 불씨는 점점 커진다. 어빈 위원회에서 닉슨 대선 캠프 관련자들의 증언이 잇따르며 여론도 불리하게 돌아갔다. 백악관 보좌관 알렉산더 버터필드는 닉슨이 자신의 집무실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대화를 비밀리에 녹음했다는 사실까지 폭로한다.

닉슨도 그냥 물러서지 않았다. 10월 20일. 닉슨은 문제의 녹음 테이프를 요약해서 제출하자는 타협안을 거부한 워터게이트 특별 검사 아치볼드 콕스를 파면한다. 이는 하원이 닉슨 대통령 탄핵을 검토하는 계기가 됐다. 닉슨은 1974년 1월 4일 열린 상원 워터게이트위원회에서 500건의 테이프와 문서 등을 제출하라는 소환장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행정부의 특권을 내세워 거부했다.

상황은 점점 닉슨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같은 해 7월 대법원은 대통령이 특별 검사가 요구하는 테이프를 제출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판결 8시간 만에 백악관은 승복한다고 발표했다. 7월 27일 하원 법사위원회는 닉슨에 대한 2개 조항의 탄핵안을 승인한다. 첫째 조항은 사법권 행사 방해, 둘째는 대통령 취임 선서를 반복하여 위반했다는 내용이다. 사흘 뒤 셋째 조항이 추가됐다. 위원회 소환장을 무시했다는 위헌 행위였다. 8월 5일. 결국 닉슨은 TV 연설에서 수석 보좌관과의 대화가 담긴 테이프 복사본을 공개한다. 여기에는 워터게이트 사건 엿새 뒤에 닉슨이 FBI의 사건 조사를 중지시키라고 명령하는 내용이 녹음되어 있었다. 8월 8일. 닉슨은 대통령직 사임을 발표한다. 워싱턴 포스트가 닉슨의 연루설을 꾸준히 제기하며 2년여간 탐사보도를 이어온 결실이 맺어지는 순간이었다.

당시 워싱턴 포스트가 터트린 특종은 닉슨 사임 여론을 조성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칼 번스틴·로버트 우드워드 두 기자가 닉슨 사임 전까지 1년여 동안 쓴 기사는 200여건, 대부분이 신문 1면을 장식했고 기사량으로 따지면 25만자나 되는 분량이었다. 그들은 마지막 6개월 동안 휴가도 못하고 하루 16시간씩 일했다. (당시 중앙일보 워싱턴 특파원이었던 고(故) 김영희 고문 기사를 재인용)





닉슨 대통령의 사임 소식을 전한 뉴욕타임스 1974년 8월9일자 신문


◇숱한 압력과 비난을 이겨낸 워싱턴포스트의 힘은=무려 2년여에 걸친 워싱턴포스트의 탐사 보도는 기자 한두 사람의 힘이 아니었다. 현장에선 칼 번스틴과 로버트 우드워드라는 민완 기자들이 발로 뛰었지만 이를 진두지휘하고 물심양면 지원한 편집국장과 발행인의 힘이 없었다면 빛을 발하지 못했을 것이다.

워싱턴포스트의 발행인은 그레이엄 캐서린 여사. 자살한 남편을 대신해 발행인을 맡았던 그는 숱한 압력과 비난으로부터 워싱턴 포스트를 지켜낸 것으로 평가된다. 당시 워싱턴 포스트가 받았던 압력을 상상을 초월했다. 백악관은 워싱턴 포스트를 ‘저질 저널리즘’이라고 폄훼했고 기자들은 공식 브리핑에서 제외됐다. 워싱턴 포스트가 소유하고 있던 플로리다의 TV 방송국은 현지 공화당원의 광고 보이콧 때문에 파산 위기에 몰리기도 했다.

그러나 캐서린은 닉슨 행정부의 외압을 막으면서 기자들을 전폭적으로 신뢰했다. 심지어 이들을 대신해 감옥에 갈 각오로 임한다. 캐서린이 닉슨 행정부의 압력에 주춤거리는 기자들을 격려하며 “우리는 이제 물살의 중심에 서 있기 때문에 다시 돌아갈 수 없다”고 한 말은 두고두고 회자 된다. 그는 세무조사, 방송국 허가권을 갱신해주지 않겠다는 협박, 심지어 주식을 사들여 경영권을 빼앗으려는 시도 등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결연히 맞섰다.

또 한 명 기억해야 할 이름은 벤 브래들리. 브래들리는 1968년부터 무려 23년 동안 워싱턴 포스트의 편집국장을 지냈다. 그가 재임하는 동안 워싱턴 포스트는 일개 지역 언론에서 전 세계적 영향력을 지닌 매체로 거듭났다. 아마도 닉슨 행정부에게 브래들리는 눈엣가시처럼 여겨졌을 것이다. 브래들리는 1971년 일명 ‘펜타곤 페이퍼’와 1972년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닉슨 행정부에 치명타를 가했다. 펜타곤 페이퍼는 미국의 베트남 공격의 빌미가 됐던 1964년 통깅만 사건이 조작됐다는 미 국방부 기밀문서를 보도한 것이다. 이를 계기로 미국 내 반전 운동에 불이 붙었고 닉슨 행정부의 도덕성은 땅으로 떨어졌다.

워터게이트 탐사보도는 결정타였다. 브래들리는 하워드 사이먼스, 해리 로젠펠드, 베리 서스먼 등 편집국 간부들과 함께 관련 보도에 직접 관여했다. 취재 지시부터 사실확인, 기사 작성까지 취재 및 보도의 ABC를 지키며 진실 보도를 위해 노력한 것으로 평가된다.

/탐사기획팀=김정곤기자 mckids@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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