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사랑이었다. 사랑에 대한 열정이었다. 그는 죽음이 아닌 영원히 사는 삶을 택했다.
수백가지의 꽃내음이 초입부터 손님을 반기는 발하임. 왁자지껄한 마을 광장에서 인형극을 하고 있는 롯데에게 베르테르는 처음 보는 순간, 한눈에 반해버린다.
그녀의 모습을 담은 그림을 건네고, 책을 선물받아 오는 날. 책 때문인지, 책을 포장한 그녀의 머리끈 때문인지…천국이며 낙원같은 발하임의 밤은, 온통 노란 빛으로 가득한 이 밤은, 그에게 하룻밤이 천년처럼 다가왔다.
카인즈, 주인을 짝사랑한다는 정원사에게 그는 말한다. 사랑은 자신도 모르게 슬며시 온 몸을 적셔 버리는 것이라고. 기름을 안고 불 속으로 뛰어들어도 마음을 불태우라고. “사랑의 확신이 타오른다”는 그를 보며 ‘그저 잠시 머무는 나그네일 뿐’인 베르테르는 확신한다. 결정된건 없으니 두려워 말라고. 그녀에게 가자고.
무슨 운명의 장난인가. 이른 아침 고백하러 간 그에게 약혼자가 있다고 기뻐하며 하며 건넨 꽃다발을 돌려주고 알베르트를 맞으러 달려가는 롯데. 차마 산책하다 들렀다며 둘러대고 자리를 피한 그는 더 이상 사랑에 웃을 수도, 사랑에 응원할 수도 없는 운명이 되어버린다. 어제까지만 해도 카인즈의 사랑을 빌었던 그 잔을 떨어트리며 그는 기차 경적 뒤로 사라진다.
얼마나 흘렀을까. 아픔을 딛고 확신에 차 돌아온 그 앞에 이제는 신부가 되어버린 롯데. 끝내 자신의 모든 열정을 상실한 그는 장식장을 열고 권총을 들어 알베르트를, 또 자신을 겨눈다. 나에게 단 한마디만, 단 한마디만 ‘사랑한다고’ 해달라 절규하지만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는다.
사랑을 완성했다는 카인즈의 살인. 여주인을 때리던 그녀의 오빠를 살해한 그의 죄를 감안해달라고 베르테르와 발하임 사람들은 법관 알베르트 앞에 무릎 꿇는다. ‘순결한 백포도주가 핏물로 그의 가슴을 물들였다’고, ‘저지른 죄 실로 무겁고, 지은 죄가 크더라도 아름다운 청년의 영혼을 품어달라’ 절규하지만 단칼에 거절당한다. “살인자를 변호하고 감싸고 도는 것은 법관과 법을 모욕하는 것”이라는 알베르트 앞에 그는 무력하다.
카인즈는 말한다. 모두가 비난해도 아무렇지 않다고. 내 마음은 평화롭고 내 몸은 자유롭다고. 불꽃처럼 피었다가 꽃잎처럼 지더라도, 기름을 끌어않고 불속으로 뛰어들어도 후회하지 않겠다고. 마음을 불태웠으니 한줌 재로 남는대도 내 마음을 평화로울 것이라고. 그는 안다. 자신의 마지막 선택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끝내 마음을 고백할 수밖에 없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고, 당신이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고 쏟아내는 그에게 롯데는 말한다. “다만 지나치치 않게, 예전 그대로 다가와주면 안되겠냐”고. 사랑과 열정을 그녀 앞에 남김없이 쏟아낸 그는 더 이상 버틸 힘이 없다.
롯데가 보이는 언덕으로 오르는 길, 한발 한발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겨 그녀가 보낸 권총과 그녀가 건넨 머리띠를 손에 함께 묶는다. 한번 두번 감을수록 점차 짧아지는 노란 머리띠. 해맑은 그녀의 모습과 발하임의 아름다움이 찰나에 스친다. 그녀의 환한 빛 만큼이나 어두워지는 그의 그림자. 그리고 기쁨과 좌절과 이별이 공존하는 이 노래….
그대는 어쩌면 그렇게 해맑을 수 있는지 /
당신의 그 미소만큼씩 내 마음은 납처럼 가라앉는데 /
그댄 어쩌면 그렇게도 눈부실 수 있는지 /
당신의 그 환한 빛만큼씩 내 마음엔 그림자가 지는데 /
나 그대 이제 이별 고하려는데 내 입술이 얼음처럼 붙어버리면 /
나 그대를 차마 떠나려는데 내 발길이 붙어서 뗄수가 없으면… /
-내 발길이 붙어 뗄 수가 없으면-
/최상진기자 csj8453@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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