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세와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이 출범한 지난 1947년 이후 70년 넘게 이어져오던 자유무역주의가 중국의 부상과 미국의 견제로 크게 흔들리고 있다. 미국의 화웨이 제재로 촉발된 5G 등 ‘기술 패권’ 다툼이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 출범 이후 지역별 안보 이슈와 결합되며 ‘지역 패권’ 다툼으로 확대됐다. 바이든 행정부 출범 이후 한층 촘촘해져가는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과 유라시아 대륙을 하나의 경제권으로 묶기 위한 중국의 ‘일대일로(一帶一路·육상해상 실크로드)’ 전략이 정면충돌하면서 무역전쟁의 틀은 ‘다(多) 대 다’로 급변하고 있다. 최석영 경제통상 대사는 “이전에는 신자유주의가 ‘뉴노멀’로 여겨져 확산했듯 이제는 각국의 산업을 지키기 위한 보호무역주의가 뉴노멀로 자리매김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GATT 체제의 자유무역주의를 등에 업고 급성장한 한국 경제는 선택의 순간에 처했다. 북한이라는 핵심 리스크와 미국·일본·중국·러시아 등 이른바 ‘4강(强)’에 둘러싸인 지정학적 위치와 함께 미국 주도의 무역 질서가 우리에게 선택을 강요한다. 무역 의존도가 63.51%로 주요20개국(G20) 회원국 중 독일(70.82%)에 이어 2위인 우리 입장에서는 과거와 같은 균형자잡기는 불가능하다. 새로운 무역 질서 속에서 잘못된 선택은 우리 경제를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위기 상황으로 몰고 갈 수 있다.
전문가들의 해법은 엇갈린다. 미국과 중국이 참여를 검토하고 있는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에 한국이 한시 빨리 가입해 우군을 다수 확보하는 등 ‘제3의 길’을 찾자는 주장도 나온다. 반면 미중 무역 분쟁은 이제 ‘상수’가 된 만큼 ‘전략적 모호성’을 버리고 미국을 중심으로 한 경제 블록과 노선을 같이 해 확실한 새 판 짜기에 나서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21일 홍콩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와 인터뷰한 리처드 헤이다리안 필리핀 폴리테크닉 대학 교수는 알래스카 미중 고위급 회담에 대해 “미국의 중국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사상 최고 수준이라는 점을 보여줬다”며 “갈등의 골을 확인했을 뿐”이라고 평가했다.
공동성명조차 없이 끝난 미중 고위급 회담 이후 ‘우리 편에 서라’는 미국과 중국의 압박은 더욱 거세질 것으로 전망된다. 미국은 미국·일본·인도·호주 등의 4자 협의체인 ‘쿼드(QUAD)’ 체제를 중심으로 안보를 시작으로 경제로 대(對)중국 공동전선을 확대할 것으로 전망된다. 지난 12일 바이든 대통령은 쿼드 첫 정상회의에서 “미국은 우리의 파트너 및 이 지역의 모든 동맹국들과 함께 안정을 위해 협력할 것을 약속한다”고 강조했다.
당장 미국 무역대표부(USTR)가 움직이고 있다. USTR이 이달 초 공개한 통상 의제 보고서에는 “중국의 불공정한 무역 관행에 대처하는 데 가용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겠다”고 밝히며 중국을 위협했다. USTR 측은 특히 “중국의 억압적이고 불공정한 무역 관행이 미국의 기술적 우위를 위협하고 공급망의 복원력과 국익을 훼손하고 있어 이에 대한 포괄적 전략을 마련하겠다”고 경고했다. 포괄적 전략에 쿼드뿐만 아니라 동맹국 등과 함께 가는 중국에 대한 압박이 담길 것은 명백하다.
미국 내에서는 이제 한국의 선택을 대놓고 강요한다. 미국의 싱크탱크인 신미국안보센터(CNAS)는 지난해 11월 한미 동맹 전략 보고서를 통해 “자유롭고 개방적인 인도태평양을 위해 한국이 방어벽 역할을 할 잠재력이 있는데도 한미 동맹은 20세기 유산의 수렁에 빠져 있다”며 한국의 적극적 역할을 주문했다. 문일현 중국 정법대 교수는 “미국은 미일·한미 회담을 통해 중국과 가장 가까이 있는 자국의 동맹을 단결시켜 중국에 대한 힘을 과시했다”며 “미국이 앞으로 대중국 정책을 어떻게 할 것인지 예고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미국의 포위망이 좁혀올수록 우리 정부를 상대로 한 중국의 압박도 강해지고 있다. 중국 관영매체인 글로벌타임스는 12일 “한국이 쿼드에 가입하면 막 회복한 중국과 한국 사이의 전략적 상호 신뢰가 필연적으로 손상될 것”이라고 압박했다.
전문가들은 선제적인 전략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당장은 미국과 중국이 모두 가입을 검토 중인 CPTPP에 가입하는 등 먼저 움직여야 한다는 것이다. 김수동 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미중 간의 갈등으로 기존 글로벌 밸류체인(GVC)이 약화되고 재편되는 과정에서 CPTPP를 활용할 필요성이 있어 보인다”고 지적했다. 박태호 전 통상교섭본부장도 “바이든 대통령은 CPTPP를 활용해서 중국을 압박할 것”이라고 전망하는 만큼 CPTPP를 적극 활용해야 한다는 지적이 잇따른다.
미중 간의 갈등이 갈수록 격화되고 있는 데다 갈등의 장기화가 불가피한 만큼 확실한 ‘택일’을 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정인교 인하대 경제통상학과 교수는 “알래스카에서 진행된 미중 고위급 협의 결과에서 보듯 미국과 중국은 이제 ‘각자의 길’을 간다고 봐야 되며, 한국 입장에서는 통상 외에도 국가 안보와 민주주의 가치 등을 종합적으로 판단해 미국 편에 서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며 “사드 보복과 같은 중국의 또 다른 경제 보복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높지만 국가 전체의 손익계산 틀에서 미국을 선택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세종=양철민 기자 chopin@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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