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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재규 삼성자산운용 부사장 "20년전 읽은 책 한권···내 인생도, 한국 자본시장도 바꿨죠"

[이사람]'한국 ETF 아버지' 배 부사장

존 보글의 책 읽고 인덱스펀드 확신

2002년 국내 최초 ETF상품 출시

초기 외면에도 '10년내 승산' 판단

2009년 금융위기 계기로 대중화

운용규모 0원서 31조까지 키워내

액티브로 진화한 ETF 성장성 여전

'인류과제' 환경·디지털 분야 투자 유망





“약 20년 전 황영기 당시 삼성자산운용 사장이 제게 영어 원서 한 권을 건네줬습니다. 세계 최대 인덱스 펀드 운용사인 뱅가드운용의 설립자 존 보글이 쓴 인덱스 펀드에 대한 책이었죠. 그 책 한 권이 제 인생을 완전히 바꿨습니다.”

배재규 삼성자산운용 부사장은 상장지수펀드(ETF)를 국내에 데뷔시킨 주인공이다. 이후 여러 ETF 상품을 히트시키며 시장을 이끌어오고 있다. 그가 지난 2002년 10월 한국의 자본시장에 첫선을 보인 ETF 시장은 20년이 채 안 돼 올해 60조 원을 돌파할 정도로 크게 성장했다.

그가 이끄는 삼성자산운용의 ETF사업부는 국내시장에서 50%라는 압도적인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으며 현재 총 121개의 ETF를 운용하고 있다. 그의 데뷔작 ‘KODEX200 ETF’는 이제 4조 5,000억 원짜리, 국내 최대 주식형 ETF 상품으로 성장했다.

삼성자산운용을 누구도 넘보지 못하는 아성의 ETF 운용사로 성장시킨 배 부사장의 오늘을 있게 한 책은 ‘성공하는 투자 전략 INDEX펀드(Common Sense On Mutual Funds)’다. 배 부사장은 그 책을 당시 다섯 번 이상 읽었다. 그러면서 당시 한국에서는 생소했던 인덱스 펀드에 대해 눈이 번쩍 뜨이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인덱스 펀드가 액티브 펀드의 수익률을 장기적으로 이긴다는 데 확신을 넘어 신념을 갖게 됐습니다. 효율적인 시장에서는 매니저가 초과 수익을 내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장기적으로 운용 수수료가 싼 인덱스 펀드를 액티브 펀드가 절대 이길 수 없다는 점이 이론적으로 증명됐습니다. 선진 증시인 미국에서 인덱스 펀드는 성공을 거두고 있었고 점차 효율적인 시장으로 바뀌는 한국에서도 10년간 한 우물을 파면 승산이 있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문제는 당시에 지수 수익률을 그대로 복제하는 인덱스 펀드를 만들어도 팔리지가 않았다는 점이다. 그때만 해도 펀드 매니저가 투자 종목을 직접 고르는 액티브 펀드가 시장을 휩쓸고 있던 시기였다. 판매사들은 철저히 외면했다. 배 부사장은 증권사나 은행 등 판매사를 거치지 않고 직접 인덱스 펀드를 팔 방법을 고민했다.

그는 “인덱스 펀드의 성공에 대해 내가 아무리 확신해도 판매사들을 설득하기 힘들었다”며 “그래서 직접 고객들에게 팔 수 있는 방법을 연구했고 해외에서는 주식처럼 펀드를 거래할 수 있는 ETF가 도입돼 있다는 얘기를 듣고 ‘바로 이거구나’ 싶었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산 넘어 산이었다. 국내에는 없던 상품이었던 탓에 제도부터 만들어야 했다. 재정경제부(현 기획재정부) 증권제도과를 직접 찾아갔다. 당시 임종룡 과장(전 금융위원장)과 김태현 사무관(현 금융위 사무처장)에게 설명하니 이들이 한 번 해보자며 태스크포스(TF)를 구성했다. 재경부·한국거래소·자산운용사 관계자들이 모여 1년 정도 머리를 맞대고 제도를 완성시켰다. 드디어 2002년 10월 13일 삼성자산운용·LG투자신탁·한국투자신탁운용·CJ자산운용 등이 ‘KODEX200 ETF’ ‘KODEX50’ ‘KOSEF200’ 등을 상장했다.

“ETF 첫 상장 초기에 돌풍은커녕 미풍도 불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럴 줄 알았죠. ETF의 씨앗을 심은 뒤 싹은 우여곡절 끝에 틔웠으나 아름드리나무가 될 만큼 토양이 성숙하기는 힘든 상황이었죠. 한국 증시가 좀 더 투명하고 효율적인 시장으로 바뀌고, 투자자를 교육하는 데 시간도 필요했습니다.”

‘10년의 비전’을 가슴에 품은 배 부사장은 버티기에 들어갔다. “ETF 사업을 하려면 적어도 4~5명 규모의 팀을 유지해야 하는데 이들의 ‘밥값’을 할 방책이 필요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판매사들이 원하는 상품은 예금이자보다 조금 더 주는 안정적인 상품이죠. 그래서 주가연계증권(ELS)을 국내에서 처음으로 만들어 이를 펀드(ELF) 형태로 만들어 팔면서 2000년대 중반의 액티브 펀드 열풍에서 팀을 지켰습니다.” 지금은 국민 재테크 상품이 된 ELS를 그가 처음 국내에서 만들었다는 점은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다.

다른 운용사들은 ETF 상품을 초기에 몇 개 내다가 돈이 되지 않으니 하나둘씩 떨어져나갔다. 그러나 배 부사장은 ELF로 수익을 내면서 다양한 ETF 상품들을 깔아두기 시작했다. 이때 매복시켜둔 ETF 중에는 레버리지, 인버스, 곱버스(인버스 레버리지)가 있었다. 특히 지수 수익률의 두 배를 복제하는 레버리지 상품은 펀드 내 주식을 담보로 선물 증거금을 마련하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통해 탄생할 수 있었다.



2008년 금융위기, 2011년 유로존 재정위기가 터지면서 증시가 출렁거리자 이런 인버스·레버리지·곱버스 ETF들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이때를 기점으로 ETF의 대중화가 이뤄졌다. ETF가 유용한 투자 수단이 될 수 있다는 점을 개인투자자들이 인식하기 시작했다. ETF를 국내에서 처음 들여오기로 마음먹은 지 약 10년 만에 배 부사장의 꿈이 서서히 현실이 된 것이다. 이후 다른 운용사들도 본격적으로 ETF 시장의 잠재력에 눈을 뜨고 적극적으로 뛰어들기 시작했고, 결국 저변은 더 확대됐다.

이후 코스피200, 나스닥100,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 500 등 국내외 시장지수형 ETF가 인기를 끌다가 지금은 테마형 ETF가 시장을 주름잡고 있다. 그리고 이제는 기존 ETF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액티브 ETF가 태동을 시작했다. 배 부사장은 “어떤 ETF가 뜰지는 아무도 모른다”면서도 “다만 다양한 상품을 미리 만들어서 길목을 지킬 뿐”이라고 말했다.

시류에 맞는 스타를 잇따라 배출했던 ETF는 운용업의 판을 뒤집었다. 변방의 상품에서 이제는 자본시장의 대세가 된 것이다. 에프앤가이드에 따르면 국내 주식형 ETF는 현재 34조 원 규모로 액티브 펀드의 순자산 규모(21조 원)를 크게 앞질렀다. 이 중에서 삼상자산운용의 ETF 브랜드인 ‘KODEX’가 붙은 국내 주식형 ETF는 약 16조 원, 해외 주식형 ETF는 약 2조 원이다.

이렇게 ETF가 각광을 받게 된 원인은 무엇일까. 배 부사장은 우선 한국 증시가 이미 인간 매니저가 초과 수익을 낼 수 있는 비효율적 시장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한국 증시가 2013년 CJ E&M , 2016년 한미약품 사건을 계기로 효율적인 시장으로 바뀌었다고 생각합니다. 소수의 애널리스트와 매니저만 알고 있는 내부 정보로 돈을 벌 수 있는 시대는 막을 내린 것이죠.” 당시 CJ E&M은 실적 악화 내용을 일부 애널리스트에게 먼저 알려줬고 개인투자자들이 이로 인해 큰 손해를 보면서 관련자들이 사법 처리됐다. 한미약품도 신약 기술 수출 계약이 파기된 사실을 일부 직원이 먼저 알고 주식을 내다 판 사실이 적발돼 법적 처벌을 받았다.

또 다른 원인은 바로 직접 투자를 원하는 동학 개미들이다. 배 부사장은 “급변하는 시장에서 적극적인 투자를 원하는 개인들의 수요를 따라잡으려면 액티브 펀드로는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예컨대 ETF는 이미 다양한 섹터·시장·스타일의 상품이 깔려 있으므로 그때그때 투자자들이 입맛에 따라 즉시 사고팔 수 있다. 반면 액티브 펀드는 출시하려면 검증된 트랙 레코드가 필요하기 때문에 즉시성이 크게 떨어진다.

이제 ETF는 지수형·섹터형을 넘어 액티브로 3.0 시대를 맞고 있지만 여전히 성장성은 크다고 배 부사장은 내다봤다. 그는 “미국의 경우 ETF가 전체 시총의 13%를 차지하고 있는데 한국은 아직 3%도 안 된다”며 “퇴직연금 내 위험 자산 투자가 더 늘어나면 국내 ETF 시장도 한층 크게 성장할 여지가 있다”고 말했다.

ETF가 시장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변신하듯 현대 자산운용업의 본질 역시 시장과 수요의 변화를 유연하게 수용하는 것이라는 게 그의 지론이다.

“과거의 자산운용업은 운용사나 펀드 매니저가 좋다고 생각하는 상품을 만드는 ‘공급자 위주’의 비즈니스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자산운용업도 수요자 중심으로 판이 180도 바뀌었습니다. ETF는 밍밍합니다. 매운맛이 아니죠. 그러나 그만큼 장기적으로 투자자들의 신뢰를 받을 수 있기에 자산운용업에 어떤 상품보다 적합한 수단입니다.”

30조 원을 굴리는 배 부사장이 생각하는 투자의 본질은 무엇일까. “결국 인류의 당면 과제를 해결해주는 기업에 투자하는 것이 본질입니다. 지금 당면 과제가 무엇일까요. 바로 기후변화와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입니다. 그러다 보니 지난해부터 이와 관련한 전기차, 배터리, 신재생, 반도체, 자율주행, 5세대(5G) 투자에 불이 붙은 것입니다.”

그가 생각하는 자산운용업의 본질도 마찬가지다. “자산운용업은 한마디로 ‘공부’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인류가 필요로 하는 변화를 끊임없이 연구하고 상품을 미리미리 만들어두는 운용사가 앞으로 시장의 선택을 받을 것입니다.”

/이혜진 기자 hasim@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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