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이 출제 오류 논란이 불거진 2022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과학탐구영역 생명과학Ⅱ 20번 문항의 정답을 취소하라고 판결했다. 법원 판결 직후 수능 출제 기관인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은 해당 문항에 대해 전원 정답 처리하고 1심 판결에 항소하지 않기로 했다. 평가원장이 이번 사태에 책임을 지고 사퇴했지만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출제 오류 소동에 평가원은 물론 교육부의 신뢰도까지 곤두박질쳤다.
서울행정법원 행정6부(이주영 부장판사)는 15일 수험생 92명이 평가원을 상대로 제기한 생명과학Ⅱ 정답 결정 처분 취소 소송 선고 기일을 열고 정답 결정을 취소한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해당 문제는 시험문제로서 가져야 할 판단 능력을 상실했다”며 “정답을 유지해 얻는 이익이 이를 취소함으로써 지키는 가치보다 적다”고 밝혔다.
생명과학Ⅱ 20번은 집단Ⅰ과 Ⅱ 중 하디·바인베르크 평형이 유지되는 집단을 찾고 이를 바탕으로 ‘보기’ 선택지 3개의 진위를 판단할 수 있는지 고르는 문항이다. 일부 수험생들은 특정 집단의 개체 수가 음수(-)가 되는 오류가 발생해 제시된 조건들을 동시에 만족시키는 집단이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한 반면 평가원은 문항의 조건이 완전하지 않아도 문제 자체는 풀 수 있다며 5번만 정답 처리했다. 법원은 지난 9일 수험생들의 집행정지 신청을 받아들여 1심 판결 선고 전까지 평가원이 발표한 정답의 효력을 임시로 정지했고 평가원은 10일 생명과학Ⅱ 성적만 공란으로 둔 채 성적표를 배부했다.
재판부는 해당 문제에 ‘명백한 오류’가 있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해당 문제에서 제시한 조건을 사용해 동물 집단의 개체 수를 계산할 경우 특정 유전자형의 개체 수가 음수로 나타나는 문제가 발생한다”며 “생명과학의 원리상 동물 집단의 개체 수가 음수일 수는 없으므로 이 사건 문제에는 주어진 조건을 모두 충족하는 집단Ⅰ·Ⅱ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재판을 끝낸 임준하(18) 군은 “수능이 끝나고도 수험생처럼 마음이 무거웠지만 학생들의 인생이 결정되는 수능에서 실수가 생기더라도 어른들이 바로잡는 노력을 해주시리라고 믿었다”고 말했다. 신동욱(18) 군은 “주변에서는 ‘굳이 네가 나서야 하느냐’라는 우려를 많이 했지만 재판 결과를 봤을 때 저희가 이런 행동에 나선 게 옳았다고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법원 판결 직후 강태중 평가원장은 “이번 일의 책임을 절감하고 자리에서 물러난다”며 사퇴했다. 평가원은 문제의 문항을 모두 정답 처리한다고 밝혔다. 또 1심 판결을 수용해 항소하지 않기로 했다.
공란으로 처리됐던 생명과학Ⅱ 성적표는 닷새 만에 채워졌지만 응시생들의 혼란은 증폭됐다. 전원 정답 처리로 평균 점수가 올라가면서 대학들이 합격 기준으로 삼는 등급 커트라인이 오르고 표준점수는 하락하기 때문이다. 표준점수는 원점수가 평균 성적과 얼마나 차이 나는지 나타내는 지표로 평균이 낮으면 표준점수 최고점은 높아지고 평균이 높으면 표준점수 최고점은 낮아진다. 평가원이 이날 생명과학Ⅱ 성적을 재채점한 결과 1등급 컷은 1점 오르고 표준점수 최고점은 1점 떨어졌다.
이에 따라 생명과학Ⅱ 응시자 간 희비가 엇갈리는 것은 물론 입시 결과에도 적잖은 파장이 예상된다. 이미 정답 처리된 수험생 입장에서는 상대적으로 점수가 떨어진 반면 오답 처리됐던 학생들의 점수는 올랐기 때문이다. 전체 수능 응시생 44만 8,138명 가운데 생명과학Ⅱ 응시자 수는 6,515명(1.5%)으로 비율이 미미하지만 과학탐구Ⅱ 과목 중 가장 많다. 생명과학Ⅱ는 의과 계열 등 상위권 학생들이 주로 선택하기 때문에 이번 결정이 당락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지구과학Ⅱ 등 다른 선택과목에 응시한 수험생들이 상대적으로 이득을 보는 등 앞으로 진행될 정시에서도 혼란이 예상된다. 재수생 조 모 씨는 “모두 정답 처리로 혜택을 보는 입장이지만 생명과학Ⅱ 표준점수가 낮아지기 때문에 손해를 볼 수도 있다”고 말했다. 한 수험생 학부모는 “우리 아이는 20번 문제 푸는 데 시간을 허비하느라 나머지 문제들을 제대로 못 풀었다고 한다”며 “전원 정답 처리되면 표준점수까지 떨어질 텐데 모두가 원망스럽다”고 지적했다.
5년 만에 또다시 수능 출제 오류 논란이 불거지면서 평가원과 교육부는 신뢰도 추락을 피하기 어렵게 됐다. 출제 오류가 공식 인정돼 ‘복수 정답’ 또는 ‘정답 없음’이 인정된 것은 2004·2008·2010·2014·2015·2017학년도에 이어 이번이 일곱 번째 수능(문항 기준 아홉 번째)이다. 특히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자녀의 입시 비리 의혹이 터진 뒤 정부가 정시 확대를 밀어붙이는 상황에서 문제가 터져 수능 재검토·폐지 논란까지 거세지는 상황이다. 이동영 정의당 수석대변인은 “수능 출제 방식에 대한 전면적인 재검토가 시급하다”며 “교차 검증이 가능하도록 개방형 출제 방식 등으로 개선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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