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거래위원회가 해운 담합 애초 심사보고서(검찰 공소장 격)에서 명시한 과징금 규모 약 8,000억 원에서 과징금을 962억 원으로 줄였다. 공정위는 해운 산업의 특성과 함께 추후 손해배상소송 가능성 등을 고려해 이 같은 판단을 내렸다지만 애초부터 ‘아님 말고’식의 무리한 제재가 진행된 것 아니냐는 비판이 나온다. 게다가 최근 물류난으로 해운사가 화주들과의 관계에서 ‘갑’에 위치한 가운데 현실적으로 소송을 제기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는 상황에서 8분의 1 수준으로 줄어든 과징금은 과당 제재의 단면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공정위의 판단에 대해 해양수산부는 “과징금 문제가 아니라 외국 정부가 우리 선사에 제재를 할 수 있는 빌미를 줬다”고 반발하고 있다.
18일 공정위는 23개 컨테이너 정기선사(12개 국적선사, 11개 외국적 선사)가 지난 2003년 12월부터 2018년 12월까지 총 541차례 회합하며 한·동남아 수출·수입 항로에서 총 120차례 운임을 합의했다고 결론을 내렸다. 공정위는 이들의 담합을 도운 동남아정기선사협의회에도 시정 명령과 과징금 1억 6,500만 원을 부과했다.
이번 조사의 최대 쟁점은 해운사들의 행위가 해운법이 인정하는 공동행위에 해당하는지였다. 해운사들이 해수부 장관 신고와 화주 단체와의 협의 등 정당한 공동행위의 절차적 요건을 갖추지 못했다는 것이 공정위의 판단이다. 해운업계는 해수부에 18차례에 걸쳐 운임 인상을 신고했다며 반발했지만 공정위는 업계에서 주장하는 신고가 운임회복(RR) 신고로 담합 효과가 크고 이번 사건에서 문제가 된 최저운임합의(AMR)와는 별개라고 봤다.
공정위 전원회의가 과징금을 대폭 깎아준 데는 산업의 특수성과 추후 화주 측의 손배소 가능성도 작용했다는 해석이 나온다. 해운사가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의 과징금이 부과되면 이를 소비자인 화주 측에 전가해 오히려 화주들의 부담이 커질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화주들이 직접 손배소를 제기하면 해운사들의 행위가 위법하다는 공정위의 판단을 활용해 피해액을 직접 보전받을 수 있다. 실제 과거 5개 정유사의 군납유류 담합 사건에서는 방위사업청이 손배소를 제기해 공정위 과징금 1,901억 원에 준하는 1,335억 원의 배상금을 국고로 환수했다. 12개 건설사의 서울지하철 7호선 연장공사 입찰담합 사건에서는 공정위 과징금(221억 원)을 뛰어넘는 270억 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이 나왔다. 다만 최근 물류난으로 해운 운임이 급등하고 수출입 기업이 컨테이너를 찾지 못해 어려움을 겪는 상황에서 해운사를 상대로 손배소를 제기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는 지적도 있다.
과징금이 깎였지만 공정위 전원회의에서 해운업계의 ‘무혐의’를 주장해온 해수부는 “돈이 문제가 아니다”라는 입장이다. 이번 결정이 국내 해운업의 경쟁력을 약화시킬 수 있다는 게 해수부의 입장이다. 최근 글로벌 물동량 폭주로 선사가 일시적으로 우위에 섰지만 전통적으로 물류 시장은 물건을 맡기는 화주가 ‘갑’인 구조였다. 이번 과징금 부과를 통해 그동안 12개 국내 연근해 선사가 화주와 맺어온 계약관계 전반이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특히 이번에 문제가 된 동남아 항로는 HMM·SM상선 등 대형선사가 아닌 중소선사 위주로 선박이 투입되고 있다. 이들은 다른 신규 항로를 개척할 여력도, 이번 과징금을 감당할 재정도 부족한 형편이다. 해수부 관계자는 “공정위가 외국 선사들까지 과징금을 부과함으로써 다른 나라들도 자국에 기항하는 우리 선사에 대해 제재할 수 있는 여지를 열어제낀 셈”이라며 “금액이 낮아졌다고 해서 선사들의 부담이 줄어들었다고 보기는 힘들다”고 전했다.
해운업계도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한국해운협회는 “하늘이 무너지는 절망과 함께 심각한 유감을 표한다”면서 “공정위의 잘못된 판단을 바로잡고 해운 공동행위의 정당성 회복을 위해 행정소송을 추진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는 공정위가 현재 한일 노선과 한중 노선 운임 담합에 대해서도 조사를 진행 중인 점을 의식한 것으로 보인다. 한국해양산업총연합회는 “한일 항로와 한중 항로에 과징금을 부과하면 국적선사의 경쟁력은 더욱 약해지고 그 피해는 우리 화주에게 돌아갈 것”이라며 공정위에 “심사를 종결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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