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부터 시행된 노동이사제로 주요 공공기관들의 이사 선임 작업이 본격화하면서 이사회에 처음 노동자 대표를 앉힌 1호 공공기관의 윤곽이 드러나고 있다. 산업통상자원부 산하 공공기관들을 중심으로 노동이사 선출에 속도를 내면서 이르면 다음 달 첫 공공기관의 노동이사가 탄생할 것으로 전망된다. 노동자를 대표해 경영에 참여할 수 있는 노동이사가 주요 의사결정에 제동을 걸 경우 윤석열 정부가 추진하는 공공기관 개혁의 동력이 떨어질 수 있다는 우려도 커지고 있다.
23일 관계 부처에 따르면 산업부 산하 준정부기관인 산업기술평가관리원은 최근 내부 심사를 거쳐 노동이사 후보자 2명의 명단을 정부에 제출했다. 이후 정부 심의를 거쳐 이르면 다음 달 최종 후보자가 결정될 예정이다. 정부 관계자는 “다른 공공기관들은 이제 막 임원추천위원회를 구성하는 단계”라면서 “공공기관운영위원회 일정 등을 지켜봐야겠지만 현재로서는 산기평이 노동이사제를 도입한 첫 공공기관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준정부기관인 산기평뿐 아니라 다른 공기업들도 노동이사 선임 작업에 속도를 내고 있다. 한국중부발전은 이달 내 임추위를 꾸리고 다음 달 중 2명의 노동이사 후보자를 선정할 계획이다. 강원랜드도 최근 노동이사제 도입을 위해 내부 규정을 마련한 데 이어 11월 중 최종 후보자를 선임할 것으로 알려졌다.
노동이사제는 노동자 대표인 1명의 비상임이사가 공공기관 이사회에 참여하는 제도다. 노동자 대표가 의결권과 발언권을 갖고 경영에 직접 참여할 수 있도록 했다. 의사결정 과정에서부터 노동자가 참여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노사 협력의 기반을 쌓고 내부 감시를 강화해야 한다는 노동계의 주장이 반영됐다.
문제는 노동이사제 도입과 맞물려 이사의 권한을 늘려야 한다는 노동계의 목소리가 점차 커지고 있다는 점이다. 양대 노총 등은 △노동자의 요구 사안을 이사회 안건으로 부의할 수 있는 ‘안건 부의권’ △노동이사의 노조원 자격 유지 등을 요구하고 있다. 노동이사가 노동자의 이해관계를 보다 가감 없이 대변할 수 있도록 제도를 손봐야 한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가뜩이나 노조의 권한이 센 공공기관에 노동계의 입김이 더 커질 수 있다고 우려한다. 그동안 공공기관 부실을 키운 요인 중 하나로 과도한 복지와 임금이 지목되는데 이 같은 문제를 되레 키울 수 있다는 점이다. 특히 재무구조 개선을 위해 정부가 추진 중인 공공기관 개혁 방향과도 충돌할 소지가 다분하다. 정부는 비핵심 자산 매각과 인력 조정 등을 골자로 한 재무 개선안을 추진하고 있는데 노동자의 고통 분담이 불가피한 항목이 대부분이다. 한국노동연구원장을 지낸 박기성 성신여대 경제학과 교수는 “(지금처럼) 재무 상황이 안 좋을 때 노동자 대표가 회사 전체가 아닌 노조의 이익만 대변한다면 공공기관 문제가 더 꼬일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재계도 노동이사제 확산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공공 부문을 시작으로 민간 부문에도 노동이사 도입 요구가 거세질 수 있기 때문이다. 대기업의 한 임원은 “현 정부가 당장 민간에 노동이사 도입을 압박하지 않더라도 향후 정권이 바뀌는 과정에서 어떤 식으로든 민간에도 영향력이 미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국민연금처럼 민간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공공기관이 노동이사제 도입 후 간접적으로 시장 전반에 실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국민연금이 투자기업 선정 시 노동이사제 도입 여부를 일종의 환경·사회·지배구조(ESG) 지표로 봐 투자 여부를 결정할 경우 대다수 기업이 노동이사 채택을 검토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또 시장 영향력이 큰 한국전력이나 한국토지주택공사(LH) 등도 노동이사의 입김이 이사회의 투자나 발주 결정에 영향력을 미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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