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석 전 국민의힘 대표는 영민하다. 특유의 달변과 기상천외한 논리로 노회한 정치인들 사이에서도 자신의 존재감을 부각하는 능력이 탁월하다. 불과 1년 전만 해도 보수당의 차세대 주자로 추앙받던 그가 정치 인생 최대 위기에 봉착했다. 이 전 대표가 낸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회 효력 정지 가처분 심문이 14일 열린 데 이어 16일에는 성 접대 의혹과 관련된 경찰 소환 조사가 예정돼 있다. 이 전 대표는 지난달 주호영 당시 비대위원장 체제에 대한 효력 정지 가처분 신청에서 완승을 거뒀던 만큼 자신하는 표정이 역력하다. 하지만 두 번째 법적 공방에서 승리한다 해도 경찰 수사는 예단하기 어렵다. 궁지에 몰릴수록 이 전 대표는 공세의 고삐를 바짝 쥐고 전의를 불태운다. 이 대표 스스로 검투사 막시무스가 돼 복수혈전에 뛰어든 덕분에 국민의힘은 당헌을 바꾸고 비대위를 새로 꾸리는 난리 통을 겪었다. 대선과 지방선거를 모두 이긴 집권 여당이 한 해에만 수 차례 비대위를 꾸렸다 해체했다를 반복하니 이런 코미디가 없다. ‘도로 새누리당’으로 유턴하느냐는 비아냥이 나오지만 적어도 이 지경으로 몰고 온 가장 큰 책임은 이 전 대표에게 있다.
대선 과정에서 두 차례나 당무를 거부하면서 내부 분열을 키웠고 당시 형성된 이 전 대표와 ‘윤핵관’ 사이의 앙금은 집권 후 당내 주도권 갈등의 불씨가 됐다. ‘체리따봉’ 문자 파동이 원인을 제공했지만 적어도 당 대표라면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 달랐어야 했다. 대화와 타협, 관용과 절제라는 정치의 요체를 외면한 채 갈라치기와 혐오 정치로 일관했던 건 가장 아쉬운 대목이다. 세상의 중심에 자신만이 존재하는 ‘유아적인 자기 정치’에 빠져 있다는 비판이 나오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국민의힘에 이 전 대표가 있다면 더불어민주당에는 이재명 대표가 있다. 이 대표는 선명하다. 특유의 돌파력과 사이다 발언은 그의 선명성을 뒷받침하는 비장의 무기다. 호불호는 갈리지만 그만큼 강력한 팬덤이 있다. 하지만 그를 둘러싼 사법 리스크는 민주당에는 재앙이다. 경찰은 13일 성남FC 후원금 의혹 사건과 관련해 제3자 뇌물 공여 혐의가 인정된다며 검찰에 송치했다. 앞서 검찰은 대선 기간 허위 사실 공표 혐의로 불구속 기소했다. 공소시효가 임박했던 공직선거법 수사가 일단락된 만큼 대장동·백현동 개발 특혜, 변호사비 대납 등 이 대표와 주변 인사가 연루된 각종 의혹에 대한 수사에도 속도가 붙을 것으로 전망된다. 이 대표는 “전두환식 선전포고”라며 반발하고 민주당은 ‘김건희 특검법’으로 물타기에 나섰다. 단 한 명의 이탈도 없이 의원 전원이 서명했다니 ‘이재명의 민주당’으로 확실히 탈바꿈한 모양이다. 하지만 각종 여론조사에서 응답자 절반 이상이 이 대표에 대한 검찰 수사에 ‘문제가 없다’고 답했다. 그런데도 ‘정치 보복’이라는 프레임으로 정쟁화하는 것은 법치에 대한 도전이다. 설상가상으로 이 대표가 선거법 위반 혐의로 100만 원 이상의 벌금형을 확정받으면 민주당은 선거 비용 434억 원 전액을 토해내야 한다.
이 전 대표는 국민의힘을 흔들고 이 대표는 민주당을 위기에 빠뜨리는 ‘X맨’이라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무엇보다 안타까운 것은 여당과 제1야당의 전·현직 대표들이 이 나라 민주주의를 위태롭게 만든다는 사실이다. 상대를 인정하는 관용과 권력의 절제 등 민주주의 정신에 대한 깊은 성찰과 실천 의지가 부재한 탓이다.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랫은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에서 “양당 지도자는 서로를 정당한 경쟁자로 받아들였고 시한부로 주어진 제도적 권리를 오로지 당의 이익을 위해서만 활용하려는 유혹에 굴복하지 않았다. 관용과 절제의 규범은 미국 민주주의를 보호하는 연성 가드레일로 기능하면서 당파 싸움이 파멸의 나라로 떨어지지 않도록 막아줬다”고 했다. 마침 9월 15일은 유엔이 제정한 ‘세계 민주주의의 날’이다. 관용과 절제는 사라진 채 음모와 요설(妖說)이 넘치는 4류 정치 탓에 대한민국은 민주주의 위기를 걱정해야 하는 처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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