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인과 건축가가 함께 만든 도시예요.”(건축가 승효상)
“책이 만들어지는 공간이 뭘까? 글의 집을 지어야 되거든.”(이기웅 열화당 대표, 파주출판단지 이사장)
출판을 불온한 대상으로 바라봤던 군부독재 시절, 책을 통해 사회를 바꿔보고자 했던 출판인 12명은 1989년 6월 1일 파주출판도시를 준비하는 위원회를 꾸린다. 87만 4000㎡(26만평)에 달하는 ‘글의 집’을 위한 공식적인 첫 발걸음이었다.
이는 이기웅(열화당)·김경희(지식산업사)·김언호(한길사)·고(故) 박맹호(민음사)·윤형두(범우사)·고 전병석(문예출판사)·허창성(평화출판사) 등 군부독재에 맞서 의미있는 책을 펴냈던 7명의 출판사 대표들이 북한산에서 그들의 유토피아를 만들어 보자며 맺은 ‘북한산 결의’가 발아한 떡잎이었다. 이 자그마한 잎은 준비위원회로, 다시 출판문화산업단지 건설조합 발기인단, 출판문화산업단지 사업협동조합 등으로 성장했다.
출판인들은 1990년 출판도시 조성에 참여할 업체를 모아 당시 30억원에 달하는 기금을 확보하는데 성공했다. 일산에 출판문화산업단지를 조성하기로 하고 정부나 한국토지개발공사(LH) 등과 협의했지만, 신도시 개발계획이 지연되거나 토지가격 문제 등으로 산단 부지 매입이 불발되기도 했다. 이렇듯 수년에 걸쳐 시나브로 글의 집을 준비해 온 출판인들은 문민정부가 출범한 1993년 7월, 출판단지 조성이 긴요하다는 점을 강력히 요청했고 정부가 지원을 약속하면서 글의 집을 조성하기 위한 노력은 급물살을 타게 된다.
이듬해인 1994년 정부 차원의 사업추진단이 결성되고 당시 경기도 파주군 교하면 문발리가 출판도시의 자리로 낙점된다. 국유지와 지자체 소유 부지, 사유지 등 140만㎡(42만 3000평) 부지를 확보하는데 성공한 출판인들은 새로운 도시를 꿈꿨던 5명의 건축가(승효상·민현식·플로리안 베이겔·김종규·김영준)을 만나 도시의 밑그림을 마련한다. 그들은 2000년 4월 26일 성공적인 도시 건설을 위해 공공의 이익을 우선하겠다는 뜻을 천명한 이른바 위대한 계약을 체결하며, 글의 집을 현실화한다.
정다운, 김종신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영화 ‘위대한 계약: 파주, 책, 도시’는 세계에서 유일무이한 책을 위한 생태도시인 파주출판도시가 만들어진 이유부터, 어떻게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는지 조망했다. 또 이 영화는 파주출판도시의 건축적 가치는 물론, 도시공학·생태학적 의미도 다루며 현재 파주출판도시라는 공간 속에서 예술가들이 어떻게 자신들의 창작활동을 펼치고 있는지도 담아냈다.
한국건축문화대상이 건축물 외에 건축문화까지 지평을 넓히며 2022년 처음 제정한 건축문화진흥부문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한 정다운 감독은 “파주출판도시는 출판인들과 건축인들 그리고 조경인들까지 많은 분들의 꿈과 열정이 만나 이루어진 도시이자, 민간이 기획하고 국가가 도시개발로 발전시킨 세계에서 유일한 도시”라면서 “그분들이 한 마음으로 뭉치고 이상향일 수도 있는 도시를 만들어간 과정 자체가 지금은 상상도 못할 정도의 공동체성을 느끼게 한다”고 말했다.
정 감독은 또 자신의 영화가 많은 이들에게 “파주출판도시가 품었던 가치에 대해 생각할 기회”로 여겨지길 원했다. 이 영화는 30년이 넘는 긴 세월을 시간의 흐름에 맞춰 보여준다. 파주출판도시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이들과의 인터뷰나 기록사진 등을 적절하게 배치해 출판과 건축의 만남을 속도감 있게 다룬 것이 특징이다.
정 감독이 남편이자 영화 제작의 파트너인 김종신 감독과 영화 ‘위대한 계약: 파주, 책, 도시’를 제작하게 된 계기는 200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들은 그 해 파주출판도시를 주제로 삼아 개최된 베니스 건축비엔날레를 위한 영상 제작에 참여해 이기웅 파주출판단지 이사장, 승효상 건축가 등을 인터뷰했다. 그 인연은 2018년 이기웅 이사장이 그들에게 파주출판도시 30주년을 기념하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해 달라고 제안하며 영화 ‘위대한 계약: 파주, 책, 도시’의 시초가 된다. 정 감독은 관계자의 증언과 과거 기록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다큐멘터리 형식의 영화를 제작하면서 101분이라는 짧은 러닝타임에 압축하는 과정이 가장 어려웠다고 털어놨다. 출판계가 주축이 돼 만들어진 도시인 만큼, 도시의 탄생에 대한 자료는 훨씬 촘촘하고 방대했기 때문이다.
그는 “저희가 선택하는 부분이 다큐멘터리를 통해 파주출판도시의 역사로 재편집된다는 사실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기 때문에, 선택과 삭제의 측면에서 많은 부담이 있었다”며 “최선을 다해 노력했지만 (파주출판도시는) 수많은 분들의 역사가 함께 쌓여 있는 곳이기에 저희가 정리한 내용이 충분치 않다고 느끼는 분들도 계실 것”이라고 말했다.
정다운·김종신 감독은 건축 전문 영화영상제작사 기린그림을 운영하며 ‘위대한 계약: 파주, 책, 도시’을 비롯한 건축 관련 영화를 꾸준히 선보인 공로를 인정받아 이번 수상자로 이름을 올렸다. 그들은 2019년 8월 재일 한국인 건축가 고 이타미 준(유동령)의 작품 세계를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이타미 준의 바다’를 발표해 영화·건축계의 지대한 관심을 받기도 했다. ‘이타미 준의 바다’는 다큐멘터리 영화임에도 2만 3000여명에 달하는 관람객을 동원하는데 성공하며 한국 건축 영화의 무한한 가능성을 증명해 내기도 했다.
정 감독은 한국건축문화대상의 수상 소감으로 “영화가 지닌 힘을 다시 한번 느꼈다”고 고백했다. 그는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과정이 정말 힘들 때가 많은데 저희가 이렇게 큰 선물과 같은 상을 받아도 되는지 여전히 얼떨떨하다”면서 “부모님께서 많이 기뻐하시고 아이들이 신나 하는 모습은 저희에게 또 다른 큰 선물이다. 저희 기린그림이 여기까지 올 수 있게 도와주신 수많은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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