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김진태 강원도지사의 채무불이행 선언으로 회사채 시장이 요동쳤다. 소위 레고랜드 사태다. 정부의 50조 원 투입 약속과 한국은행의 유동성 공급으로 급한 불은 막았다. 강원지사도 사과하면서 채권시장은 안정세를 찾는 모습이다. 그러나 표면 아래에서 마그마는 여전히 끓고 있다.
사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4연속 빅스텝(0.75%포인트 금리 인상)으로 글로벌 마켓은 언제든지 용암이 분출될 여건이 조성됐다. 인플레이션을 이유로 금리를 올린다지만 그 속도가 숨 가쁘다. 만약 한국은행이 이런 속도로 금리를 인상했다면 이미 여러 곳에서 곡소리가 났을 것이다. 인플레이션이 구조적이 아니라면서 금리 인상이 필요 없다던 연준의 지난해 모습과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금리 인상 속도에 한국만 당황한 것도 아니다. 영국 정부는 감세 조치 발표의 부메랑으로 국채와 외환시장이 요동치자 44일 만에 총리가 사임했다. 일본은 엔화 약세가 가팔라지자 견디다 못해 10월에는 61조 원의 미국 국채를 내다 팔았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한국은 미국의 금리 인상에 보조를 맞출 수밖에 없다. 기준금리가 미국보다 1%포인트 이상 낮아질 경우 외환시장 방어가 어렵다는 시각이 지배적이기 때문이다. 이 시국에 흥국생명의 5억 달러 외채 상환 연기 발표로 외환시장마저 동요 조짐이 감지되자 금융 당국이 직접 칼을 들고 나섰다. 상황이 녹록지 않다.
올해 들어 정부는 몇 가지 실수를 범했다. 유가 상승으로 한국전력이 구입하는 전력 대금이 급등하는데도 불구하고 물가 안정을 이유로 가정에 공급하는 소매가격을 구매 원가의 2분의 1에서 3분의 1 수준으로 통제했다. 이 때문에 전기를 파는 족족 한전의 적자는 천문학적으로 늘어났다. 올해만 30조 원 적자라고 한다. 민간기업이라면 용인할 수 없겠지만 공기업이라 견디는 것 같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전력 구매 자금이 모자란 한전이 회사채를 대량 발행했다. 회사채 시장 규모가 크지 않은 터라 최우량 등급인 한전의 회사채 발행은 대기업의 회사채 시장 진입을 막아버렸다. 차선책으로 기업들은 은행에 손을 벌렸다. 그리고 은행은 대출 재원 마련을 위해 은행채를 발행한다. 이 시장 최강자인 공기업과 은행이 용호상박의 전쟁판을 벌이자 2부 리그인 여신전문금융회사, 중소기업, 중형 건설사의 차입 줄은 쪼그라들 수밖에 없다. 이 판국에 강원지사가 한번 부린 호기가 ‘레고랜드 사태’로 이어졌다. 나비효과다.
채권시장에는 나름의 서열이 있다. ‘국채·지방채→금융채→회사채→기업어음(CP)→유동화 채권’ 시장이라는 순서다. 금리 스프레드는 이 순서대로 확대된다. 그리고 레고랜드 같은 국채급 시장의 미풍은 CP·유동화 시장에는 대형 쓰나미를 일으킨다.
며칠 전 대기업들의 어닝쇼크가 보도됐다. 미중 무역 분쟁, 우크라이나 전쟁 등으로 실적이 악화된 것이다. 이 와중에 금융시장을 흔드는 악재가 하나라도 더 터지면 신용 경색이다. 취약 계층인 중소기업의 자금 조달 줄은 아예 막혀버릴 것이다. 금융 당국의 소방수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채권시장의 발행 잔액이 2700조 원이고 금융기관에서 기업대출 잔액은 1700조 원이다. 둘의 합이 국내총생산(GDP)의 2배를 넘는다. 연말에는 300조 원대 CP 만기가 도래하고 내년에는 160조 원에 달하는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시장 관련 보증 문제가 터질 것이라는 우려가 높다. 자금 문제로 성사된 계약을 포기하는 PF도 이미 속출하고 있다. 어느 곳 하나 안심할 상황이 아니다. 시장에 빨간불이 켜졌지만 당국이 서 있다는 신뢰를 심어줘야 한다. 말뿐 아니라 불이 나면 당국이 직접 자금을 투입해야 한다. 이 시장 취약 계층에 대한 대책도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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