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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람] "내 요리 맛있다는 한마디, 그 맛에 30년간 조리복 입었죠"

■조형학 조선호텔앤리조트 식음조리담당 전무

호기심·동경으로 시작한 '요리사의 길'

1991년 입사 이후 조선호텔과 함께 성장

'나의 요리할 날 오겠지' 긍정의 힘으로

말단서 한단계씩 올라 700명 총책임자로

'내 현장은 주방' 임원회의도 조리복 차림

G20 등 국제행사서 세계 정상들 식사 책임

'한국인이 만들었다고?' 리에거 칭찬 못잊어

매일 접하는게 산해진미…평소 라면 즐겨

조형학 조선호텔앤리조트 식음조리담당 전무/이호재기자




연말 분위기로 들뜬 12월이면 ‘밥상’ 차리느라 하루를 이틀처럼 나눠 사는 사람들이 있다. 산해진미 풍성한 ‘남의 한 끼’를 위해 정작 자신들의 끼니는 대충 해결하고 넘기기 일쑤인 이들은 호텔 레스토랑의 주방팀이다. 입과 눈 모두 사로잡는 ‘식탁 위 작품’이 탄생하는 주방은 그야말로 전쟁터다. 올해도 어김없이 찾아온 12월. 사회적 거리 두기 해제 이후 처음 맞이하는 연말에 주요 특급 호텔 레스토랑과 뷔페는 일찌감치 연말 예약이 꽉 찼고 더 많은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한 끼를 2번 나눠 손님을 받는 2부제를 운영하는 곳도 있다. 이 치열한 현장을 무려 30년 넘게 지키며 지금은 한국을 대표하는 호텔의 레스토랑과 700여 명의 직원을 관리하는 사람이 있다. 주방 보조에서 시작해 요리사 출신으로는 드물게 호텔 임원까지 오른 조형학(사진) 조선호텔앤리조트 식음조리담당 전무가 그 주인공이다.

최근 서울 중구 웨스틴조선서울 레스토랑 ‘나인스게이트’에서 만난 조 전무는 정장 대신 흰색 조리복을 입고 셰프의 상징인 조리모를 쓰고 있었다. ‘사진 촬영을 위해 조리복 착용을 부탁하고 싶다’는 사전 요청에 호텔 측은 ‘늘 입고 있다. 임원 회의에도 그 차림으로 들어간다’고 답변해왔다. 지난해 10월 전무 승진 후 업무의 무게가 ‘요리’보다는 ‘관리’ 쪽으로 더 옮겨갔지만 여전히 자신의 현장이요 뿌리는 주방이라는 생각에서다.

“피카소가 80~90세까지도 붓을 손에서 놓지 않았듯 저 역시 감(感)을 잃지 않겠다는 다짐 같은 겁니다.” 조 전무가 임원을 단 뒤에도 정장 대신 고수한다는 조리복은 ‘요리인 조형학’에게는 자부심이기도 하다. 유니폼 오른쪽 가슴팍에는 ‘Executive Chef(총주방장)’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1991년 조선호텔앤리조트에 입사해 걸어온 한 남자의 주방 인생이 그 안에 모두 담겼다. 조 전무는 “말단부터 중간 역할, 영업장의 주방장 등을 거쳐 어느 순간 내가 전체 주방을 총괄하는 자리까지 왔더라”며 “복장이 바뀌었다고 해서 하는 일이 달라지지는 않지만 조리복을 받았을 때의 책임감이 떠올라 여섯 벌 지닌 이 옷에 애착이 간다”고 웃어 보였다. 이어 “업무상 언제든 주방에 투입될 수 있는 데다 직원들에게 ‘말’보다는 직접 보여주며 소통해야 하는 일이 많다”며 “임원이 됐다고 주방에 사복 차림으로 드나드는 것은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조형학 조선호텔앤리조트 식음조리담당 전무./이호재기자


지금이야 ‘호텔 레스토랑 요리사’ 하면 소위 ‘있어 보이는 직업’이지만 30년 전에는 분위기가 달랐다. 조 전무도 처음부터 ‘최고의 호텔 요리사’를 꿈꾸며 이 업계에 발을 내디뎠던 것은 아니다. 어렸을 적부터 손으로 만들어내는 것은 무엇이든 자신 있었다. 찰흙이든 나무든 주재료만 주어지면 앞에 있는 사물은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눈썰미 하나로 뚝딱 만들어내는 미술을 좋아하는 아이였다. 딱 거기까지였던 ‘소년 조형학’에게 새로운 세계가 열린 것은 비교적 늦은 나이인 18세 고등학생 때였다. 1986년 아시안게임, 1988년 올림픽 등 국제적인 행사를 앞두고 귀빈 및 해외 관광객을 맞이할 호텔 산업 육성의 필요성이 커지던 때였다. “그때만 해도 호텔은 아무나 갈 수 없는 곳이었는데 마침 호텔 식음업장에서 근무하던 이모부를 따라 구경할 기회가 생겼어요. 평소 이야기만 들었던 ‘미지의 세계’에 더 호기심이 생긴 거죠.” 마침 몇 년 뒤 열릴 국가적인 행사를 앞두고 전문 조리 인력 양성을 위한 관련 학과 개설이 잇따랐고 그저 ‘평범한 돈벌이’로 ‘평범한 어른’이 되는 삶을 당연하게 여겼던 그는 군 제대 후 주방을 앞으로의 자기 생계의 터전으로 선택했다.

동경으로 시작한 요리사의 길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당장 주변의 반응부터 달랐다. 당시만 해도 한국은 한 끼 먹고 배 채우는 것이 중요했던 시절이기에 미식·식음 같은 분야에 관심이 거의 없었고 요리사를 전문 직업으로 대하는 분위기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힘든 것은 ‘요리할 기회를 기약 없이 기다려야 한다’는 점이었다. “지금은 전문 요리 학교를 졸업하고 해외에서 공부하고 온 친구들도 많아 바로 현장에 투입되거나 입사해 1년이면 칼을 잡는 게 흔하지만 옛날에는 최소 3년은 넘겨야 요리를 할 수 있었어요. 그마저도 메인이 아닌 자잘한 것이었죠.” 주방 청소부터 재료 손질, 식재료 구매 같은 업무를 거쳐 달걀 수십 개를 풀어 오믈렛을 만들고 기계처럼 (껍질) 벗기고 다듬는 일만 2~3년을 해야 했다. 조 전무는 “나라고 안 힘들었겠냐”며 “내가 이걸 언제까지 해야 하나, 이걸 하려고 여기 왔나 하는 암담한 생각에 때려치우고 싶은 마음도 사실 많았다”고 털어놓았다. 그럼에도 늘 결론은 “이건 하나의 과정일 뿐”이라는 자기 위로였다. 그는 “단계를 하나하나 밟다 보면 어느 순간에는 내가 내 요리를 주도적으로 할 날이 올 거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했다”며 “그 마음이 30년 넘게 이 일을 하게 한 원동력인 것 같다”고 말했다. 주방에 머무르면서도 ‘요리할 수 없었던’ 그 시절의 갈망을 기억하기에 조 전무가 현장, 그리고 그 현장을 상징하는 조리복에 더 애착을 보이는지도 모르겠다.



조형학 조선호텔앤리조트 식음조리담당 전무./이호재기자


‘호텔 요리 외길’은 그렇다 쳐도 한 회사에서 30년 근속은 흔하지 않다. 조 전무는 1991년 뷔페 레스토랑 ‘카페로얄’ 주방 근무를 시작으로 콜드 주방, 연구개발(R&D), 메인 주방, 신규 호텔 식음료(F&B) 개발, 외식업장 오픈 총괄 등 조선호텔 주방과 함께 나이를 먹고 성장했다. 그는 “회사에서 요리사의 존재와 가치를 인정해주고 그만큼 투자를 많이 해줬다”며 조직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실제로 조선호텔앤리조트는 해외여행이 지금처럼 활발하지 않던 시절부터 돈을 들여 주방 직원들의 해외 연수, 벤치마킹 프로그램 등을 운영하는 등 해외 특급 호텔의 선진 식음 문화를 경험하는 다양한 기회를 제공해왔다. “벤치마킹을 위해 조리팀이 가면 고급 식당이든 현지 맛집이든 들러 하루에 4~5끼는 먹어요. 그런 경험과 학습이 반영돼 조선호텔 F&B의 경쟁력이 쌓이는 거죠. 회사 경영진의 관심과 투자가 정말 중요한 밑거름이 됐고 그게 제 ‘긍정의 힘’에도 좋은 영향을 미친 것 같아요.”

조형학 전무가 2010년 서울에서 개최된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당시 정상 업무 오찬으로 선보인 메뉴. 사진 제공=조선호텔앤리조트


회사의 지원과 개인의 노력이 빛을 내 그는 2000년 아시아·유럽 정상회의(ASEM), 2005년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2010년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등 굵직한 행사에서 세계 정상들의 식사를 담당하기도 했다. 2010년 서울에서 열린 G20에서 32명의 요리사와 함께 정상 및 국제기구 대표, 수행원 등 135인분의 식사를 책임져야 했던 조 전무는 “준비 기간 동안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 살이 쪽 빠졌다”고 회상했다. 당시 조 전무는 ‘한국에서 나는 좋은 식재료의 맛을 살리는 데’ 방점을 찍고 메뉴를 구상했다. “처음에는 고급 재료로 접근했는데 오찬 테이블에 앉는 분들이 철갑상어 알이나 송로버섯 같은 고급 재료는 이미 더 많이 맛보지 않았겠어요? 그래서 한국의 좋은 재료로 고유의 맛을 잘 표현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죠.” 실제로 당시 메뉴를 보면 샐러드와 수프, 메인 요리, 디저트 등 4개 코스로 마련한 오찬은 서양식이었지만 바닷가재 샐러드에는 깻잎과 치커리 등 쌈 채소를 사용하고 디저트에 제철 과일인 사과를 이용해 케이크를 만드는 등 한국 식재료를 최대한 많이 썼다.

그렇다고 ‘한국적인 것’만 강조하는 것은 아니다. 조 전무의 전공은 양식으로 이 분야에서 전문성은 익히 알려져 있다. 프랑스를 대표하는 인테리어·가구 디자이너 크리스티앙 리에거(1943~2020)가 생전 사업차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당시 누적된 피로와 시차에 지쳐 있던 그는 호텔 도착 후 조 전무가 만든 저녁을 먹고는 “이 요리를 진짜 한국인이 만든 것이냐. 보통 요리가 아니다”라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아직도 그 피드백을 잊을 수 없다는 칭찬의 주인공은 “늘 정신 없고 긴장의 연속이지만 이런 고객 반응이 누적되면 그 맛에 또 요리를 즐기게 된다”고 말했다.

일터에 널린 게 고급 식자재이고 매일 접하는 게 산해진미다. 웬만한 음식은 눈에도 입에도 안 들어올 것 같은 조 전무가 평소 즐겨 먹는 것은 김치에 라면이란다. 누군가는 ‘배부른 소리’라 할지 모르지만 그는 조선호텔앤리조트 식음사업장의 요리부터 간편식(HMR), 크리스마스 케이크 등 모든 음식의 개발·상품화 과정에서 ‘맛’에 있어 마지막 관문과도 같은 존재다. 수많은 정찬을 만들고, 맛보고, 또 수없이 개선하는 것이 업(業)이어서일까. 집에서는 간단하게 김치와 찌개를 반찬 삼아, 밖에서는 웬만한 맛집 아니고서는 라면을 사 먹는 게 좋단다. “다들 호텔 레스토랑에서 일하면 요리사들이 어디로 회식을 가는지 궁금해 하는데 좋은 데 가는 팀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평범하게 고깃집에 가요. 집에서는 저라고 다를 게 있겠어요? (집사람에게) 얻어먹기 바쁘죠.(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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